무신정권의 이의방에 이어 두번째 집권자였던 정중부를 제거하고 26세의 나이에 권력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경대승 입니다.
경대승은 무신 정권 시대의 최고 집권자 중 유일하게 반역열전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경대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대승의 본관은 청주이며,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경진의 아들로 잘 나가가는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는 금수저답게 음서를 통해 15세에 국왕 친위대인 견룡군 교위가 됩니다.
그의 부친 경진이 권력을 이용해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그가 죽자 나라에 헌납을 하여 왕과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던 경대승이었는데요.
견룡위의 행수로 재직하고 있을당시 정중부, 정균 부자의 횡포와 비리에 분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경대승은 이들 부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179년 9월 허승(許升), 김광립(金光立) 등 무사 30여 명과 함께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인 송유인 등을 죽이고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6살이었습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명종은 경대승에게 축하연을 열었는데, 그자리에서 경대승은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가"라 소리쳤습니다.
의종의 척추를 꺽어 죽였던 이의민이 그자리에 있다가 겁을 집어먹고 병사를 두어 방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26세 경대승의 호통에 모든 대신들과 장수들이 벌벌 떨었다하니 그의 풍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후 이의민은 경대승을 피해 경주로 도망가 숨어살았고, 경대승이 죽은 후에야 다시 관직에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경대승은 무신정변 세력을 제거하여 중방을 무력화시키고, 무신정변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린나이에 고려를 움켜잡은 경대승은 혹여나 자신을 반대하는 인물이 생기지는 않을까라는 고민에 휩싸였고 그로인해 궐에 들어가는 것조차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변 보호를 위해 자신의 집에 도방을 설치하고 도방에서 정사를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100여명의 사병들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게 했고, 도방에서 고려를 움직였습니다.
1180년 12월 자신을 도와 정중부 일당을 제거한 허승과 김광립이 폐단을 일으키자 이들을 제거하였고, 문무관을 가리지 않고 비리를 행한자를 처벌하며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경대승은 자신이 권력을 잡은후 신하들은 물론 국왕인 명종에게까지 자신의 이념과 철학을 강요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명종 조차 경대승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경대승은 천성이 바르고 청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후 가산을 정리해보니 집 한채와 쌀 몇섬, 말먹이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를 호위하는 100인의 도방 장사들을 먹여살릴 경제적인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결국 도방 장사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약탈을 일삼았는데요.
하지만 경대승은 도방을 해체하면 암살을 당할 수 있으니 그럴수 없었고, 약탈을 말리자니 먹여살릴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할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는 경대승에게 심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결국 경대승은 암살위협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 왕의 외면과 여러 심리적인 요인들로 인해 1183년 7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를 하고 맙니다.
경대승은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그 후손들은 이를 지키기 위해 비석만 세웠다고 합니다.
고려사에는 "경대승의 상여가 나가니 백성들 중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어 그 울음소리가 왕도를 진동시키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볼때 그는 백성들의 인망을 많이 샀던 인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도방도 몰락하고 맙니다.
경대승을 멀리하던 명종은 도방과 경대승의 사병들을 색출하여 없애버렸습니다.
경대승의 죽음과 함께 명종은 무신정권을 끄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무신정권 네번째 권력자가 되는 이의민을 불러들이는 과오를 저지르고 맙니다.
무신정권 당시 있었던 권력자중 경대승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은 없습니다. 그가 단명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더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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