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의 여태후,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 이 세 여인은 중국의 3대 악녀입니다.
이중에서도 청나라의 서태후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너무나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중국 3대 악녀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28세부터 수렴청정하여 48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서태후. 서태후는 어떤 인물이며, 어떠한 악행들을 저질렀고, 최후는 어떠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태후 그녀는 권력욕이 매우 강하고 사치 마저 심했던 여인이었습니다. 효흠현황후, 자희태후라고도 불리는 서태후는 1835년 11월 29일 안휘성의 몰락한 만주족 관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서태후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고, 그러한 생활을 벗어나고자 궁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황궁 자금성에 들어갑니다.
궁녀가 된 서태후는 야심이 큰 여인이었으며, 청 황제 함풍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서태후는 궁녀 시절 미모도 뛰어났지만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합니다.
그녀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을 해 함풍제가 산책을 할 때를 미리 알고 노래를 준비해 불렀습니다. 이 노래에 반한 함풍제는 노래를 부른 사람이 서태후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함풍제의 눈에 띄어 황은을 입게 되고 후궁이 되었다고 합니다.
1856년 서태후는 함풍제의 성은을 입고 황제의 아들 동치제를 낳습니다. 아들이 없던 함풍제에게 첫아들을 낳아준 서태후는 의귀비에 책봉되지만 사실상 황후의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서태후의 권력욕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함풍제가 병석에 누웠을 때를 기회를 잡은 서태후는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보게 됩니다.
1861년 남편이었던 함풍제가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 동치제가 6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본격적으로 섭정을 펼치며 갖은 만행과 사치를 일삼습니다. 아들 동치제가 장성해 친정을 하려 했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친 자식과도 마찰이 생겼습니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행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충신들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처단했습니다.
이런 어머니 서태후를 보며 아들 동치제는 정치 대신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됩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이런 아들을 말리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텐데... 서태후는 역시 달랐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아들 동치제가 술과 기생들에 빠져드는 것을 오히려 즐겼다 합니다. 오히려 환관들에게 동치제를 기생집으로 자주 데리고 가라 명을 했다 합니다.
결국 서태후의 아들이자 청의 황제 동치제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매독에 걸려 사망합니다.
1875년 아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자신의 네 살 조카인 광서제를 황제로 만들고 섭정을 계속 이어갑니다.
이제 서태후는 청의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며 갖은 악행과 사치를 저지릅니다.
서태후가 한 끼 식사를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백성 만명이 하루 식사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 합니다. 30가지의 메인 요리와 128가지의 반찬들로 구성이 된 서태후의 1끼 식사. 서태후의 주방에는 150명의 요리사가 서태후 한 명 만을 위해 밥을 만들었다 합니다. 그리고 이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서태후는 다 먹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한 번 쳐다보기만 했을 뿐 주로 장식용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에 드는 요리는 한 입만 먹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한입 더 먹었다 합니다.
먹는 것뿐 아니라 입는 것에도 사치가 심했습니다. 금박이 입혀진 비단옷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녀의 옷을 담은 상자가 3000여 개나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피부미용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과 사치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모유가 젊음을 유지시켜주는 묘방이라 믿었던 그녀는 부녀자들을 선발해 매일 사람의 젖을 먹었습니다. 모유가 잘 나오는 부녀자들을 선발해 젖이 잘 나오도록 산해진미를 제공해 먹인 후 붉은 천을 입혀 젖만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앉게 해 누워있는 서태후에게 젖을 먹였다 합니다.
천연 진주가루를 일정 시간마다 복용했으며, 달걀흰자와 돼지기름을 섞은 팩을 피부미용을 위해 했습니다.
탈모에도 너무나 민감했던 서태후. 내시들이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다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지면 목이 달아났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루 50개 정도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이 정상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시들은 살기 위해 서태후의 머리를 빗길 때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겼으며, 머리카락이 빠지면 안으로 떨어지게 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내시가 실수를 하면 인분까지 먹이게 한 것이 서태후였습니다.
그녀의 사치는 끝이 없어 아편전쟁 이후 나라가 어려울 때도 자신의 별궁으로 사용할 이화원을 막대한 국고를 쏟아부어 재건했습니다. 이화원 재건에 투입된 돈은 무려 3000만 냥.
이 거대한 자금은 청나라 해군 북방함대의 전력 보강에 쓰일 예산을 빼돌려 마련했습니다. 서태후에 의해 예산을 충분히 쓸 수 없었던 북방함대는 전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게 됩니다. 서태후 개인의 사치로 인해 국가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던 겁니다.
이렇게 재건된 이화원 곤명호 가운데에는 남호도 라는 섬이 있었습니다. 남호도는 매일 밤 서태후의 침소인 낙수당에 수청을 들러가는 미소년과 청년들이 강제 수용된 섬이라 하여 미남섬이라고도 불린 섬이었습니다.
서태후는 자신의 침소에서 매일 밤 어린 남성들을 상대로 욕정을 불태웠습니다. 이렇게 하룻밤을 보낸 젊은 미남들은 그다음 아침이면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합니다. 서태후 자신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의식해 모두 죽여버린 겁니다.
남호도에 남아있던 미남들은 낙수당에 불려 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퇴출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씻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경에 미남자들이 없다는 말과 중국 미남은 씻지 않는다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서태후가 자신의 섭정을 위해 황제로 만들었던 광서제는 이후 장성하여 친정을 하길 희망했습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전횡을 막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지만, 원세개의 배신으로 인해 그 꿈은 물거품이 되고, 광서제는 이화원에 연금당하고 맙니다. 이후 서태후는 광서제가 총애했던 진비를 죽이는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광서제를 유폐시킨 서태후는 계속해서 섭정을 이어나갔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1908년 자신의 생일날 과식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질에 걸려 앓아누운 서태후는 10년 동안 유폐당한 광서제가 독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의 세 살 된 아들 푸이를 다음 황제로 지목합니다.
그가 바로 청나라 제1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입니다. 세 살 베기 어린 황제를 앞세워 또다시 섭정을 계속하려 했던 권력욕의 화신 서태후.
하지만 그녀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 7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서태후 그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였다고 합니다.
48년간 이어져온 서태후의 섭정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녀로 인해 피폐해진 청나라는 4년 뒤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맙니다. 권력 앞에서 자식조차 비정하게 버렸던 서태후.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유언이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강대국 청나라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앞세워 망하게 한 서태후. 중국 3대 악녀 중 단연 으뜸이 서태후라 생각이 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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