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일본 원폭

 

2차 세계대전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은 이유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와 8월9일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이로인한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피해를 안긴 두발의 원자폭탄이 왜 일본에 떨어졌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이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습니다. 이에 미국은 일본에 철과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였고, 그로인해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기 힘들정도의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습니다.

 

진주만 공습


일본은 앞으로 전쟁이 지속되면 미국과의 일전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선전포고 없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군은 3600명의 병사들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즉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그로인해 일본의 우방 나치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1942년 이 시기는 독일이 소련을 격파하고 있었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쟁의 양상이 추축국이 우세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승리를 했고, 10월에는 몽고메리의 영국군에 의해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던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이 패배합니다.


1943년 2월에는 나치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패배합니다.


일본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에 밀리게 됩니다. 이로써 전세는 연합군쪽이 우세하게 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독일은 수세에 몰렸고, 1945년 5월7일 나치독일의 상징 히틀러가 자살을 하면서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이나면서, 우방국이 사라진 일본은 연합국의 총공격을 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태평양의 제해권을 되찾은 미군은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남태평양의 섬들을 재탈환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항복을 최고의 수치로 여기면서 끝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으로 인해 미군의 피해도 상당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공방전은 이오지마(유황도) 섬(1945. 2~3월)과 오키나와 섬(1945. 4~6월)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미군은 1944년 11월부터 사이판과 괌 에서 일본의 본토를 폭격했습니다.

 

B-29 폭격기


이때 사용된 폭격기는 B-29 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새롭게 개발한 미국의 장거리 전략 폭격기 였습니다. B-29는 8000Km 이상을 이동할 수 있고, 10톤에 가까운 폭탄을 가지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폭격기였습니다.

 

이오지마(유황도)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할때 이 사이에 있던 이오지마 섬이 진로를 방해하자 미국은 섬을 점령하기로 합니다.

 

이오지마에 깃발을 세우는 미군

 

작은섬 이오지마의 반격은 매서웠고, 결사항전을 한 일본군으로 인해 미군은 7000명의 사망자와 19000명에 이르는 부상자를 내고 승리합니다.


오키나와섬 전투에서도 또다시 일본의 결사 항전으로 인해 20,000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으며 미군은 힘겹게 승리합니다.


이러한 대규모 인명 손실과 일본군의 결사적인 저항을 목격한 미군과 미국인들은 장차 일본 본토에 대한 침공작전으로 초래될 엄청난 희생을 예측하면서 상당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이에 미국은 상당히 다급한 입장이 되고 맙니다.

 


1944년 11월 말부터 미국은 일본 본토의 대도시들에 대한 야간 무차별 폭격을 합니다. 이중 1945년 3월 9일 밤 진행된 도쿄 대규모 공습은 일본에 큰 피해를 입힙니다. 300대에 달하는  B-29폭격기들이 3시간에 걸쳐서 무려 50만 개에 달하는 소이탄을 도쿄시내에 무차별 폭격합니다. 도쿄는 아비규환이 되었으며,  8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이후에도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의 도시들에도 공습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결사항전만을 외치며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비밀리에 진행하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과물로 1945년 7월 16일 원자폭탄 성능 폭발실험이 성공을 거둡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독일보다 빨리 원자 폭탄을 개발하고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젝트로 수만 명의 인원과 엄청난 경비를 투자해 진행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미국 부통령과 영국 부수상에게도 기밀로 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 조치 하에서 진행되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된 트루먼도 알게된 프로젝트였습니다.


1945년 7월 24일, 미국 정부는 일본 본토 상륙작전 시 희생될 엄청난 인명을 구제하고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명분하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소련까지 전쟁에 개입하려하자 소련에 아시아가 장악당할 수 있어 미국은 더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이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포츠담 선언에서 다시한번 일본의 항복을 요구한것이지만, 일본 수뇌부는 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하기로 합니다.


포츠담선언으로 인해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 명분은 더 힘을 얻게 됩니다.


이제 남은 일은 원자폭탄을 어디에 투하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지름 3마일(4.82km)이상의 중요한 역활을 하는 큰 도시를 기준으로 정했고, 이에 처음 쿄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타 4곳이 선정되었습니다. 수도 도쿄는 이미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있어서 제외가 되었습니다.


첫번째 후보지로 인구 100만이 넘는 교토가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미 전쟁성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이 신행여행으로 일본의 교토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역사와 문화는  보호해야 한다 주장하며 교토를 목표로 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미군의 교토 폭격은 일본의 정신을 건드리는 행위라는 이유로 원폭 대상에서 교토는 제외가 되었습니다.


다시 결정된 원폭 투하 도시는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였으며, 날짜는 1945년 8월 3일 이후로 정해졌습니다.

 

리틀보이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라는 이름의 폭격기 B-29는 반지름 37cm, 길이 3.2m, 무게 4,400여 kg인 '소년(Little Boy:리틀보이)' 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을 싣고 이륙을 했습니다.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 상공에 도착한 기상 관측 항공기가 기상 상태를 보고해왔고, 이 가운데 히로시마가 그나마 가장 나았습니다. 그래서 리틀보이의 투하 지역은 히로시마로 정해집니다.


에놀라 게이에 탄 승무원들은 히로시마 상공에서 리틀보이를 투하했습니다.

 


투하한 지 약 43초 후 시마 병원 상공 약 570m에서 폭탄이 폭발했고 거대한 흰 버섯구름은 지상 1,200미터 높이까지  솟아오르며 히로시마를 집어삼켰습니다. 폭탄이 터진 근처는 온도는 4000도에 육박했고,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습니다. 극심한 열기와 시속 800킬로미터의 엄청난 강풍에 건물을 비롯한 모든 물체들이 바스러졌습니다.

 

원폭 후 히로시마


폭발의 위력이 대단할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일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한순간에 히로시마라는 도시는 유령도시로 변해버렸고 20만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점은 이때 폭발한 리틀보이가 원래 위력보다
약하게 폭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항복을 하지 않았고, 미국은 다시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팻맨


두번째 원자폭탄의 이름은 '뚱보(fat man:팻맨)' 이었으며, 플루토늄을 사용해 만든 원자폭탄이었습니다.


1945년 8월 9일 팻맨은 고쿠라에 투하할 계획이었지만, 이날 고쿠라 상공의 일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가 계속되는 날씨가 나아질것같지 않자 미국은 투하 장소를 나가사키로 바꾸었습니다.


나가사키 역시 일기가 좋지 않았지만, 잠깐 구름사이에 틈이 생겨 그 순간 팻맨을 투하했습니다. 나가사키 역시 한순간 유령도시가 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1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원폭 후 나가사키


리틀보이와 팻맨 두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결국 8월 15일 일본 천왕은 국민들에게 항복의 뜻을 공표하며,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후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중이던 미 항공모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이 항복 문서에 정식 서명을 하면서 5년이상 끌어왔던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습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남겼던 두발의 원자폭탄. 이때 폭발로 인해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도 많은 사망했다고 합니다.


원자폭탄으로 인해 전쟁은 끝이났지만, 아직까지도 그 피해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전쟁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항복대신 천황을 위해 1억 명의 사람들이 옥처럼 부서진다는 1억 총 옥쇄를 선택해 결국은 원폭을 맞게 된 것입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져 20만명의 사상자가 났을때라도 항복을 했다면 나가사키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14만명의 사상자가 추가로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일본 천황이라는 작자와 군 수뇌부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분노 주의 -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조롱 행사.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네.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였던 일본. 그들의 필요에 의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반성하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

blogdaitso.com

 

일본 방송에서 급하게 사진에 모자이크를 한 이유 - 본인들 스스로 인정한 꼴입니다.

일본 방송중 급하게 모자이크를 한 이유 우리나라에서 일본을 좋게 보기는 힘듭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도 있지만 현재까지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독도 문제로도 계속해서 마찰을 빚고있

blogdaitso.com

 

반응형
교차형 무한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