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에게 저지른 일본의 끔찍한 만행
유관순 열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릴적 유관순 누나로 배웠던 우리에게는 언제나 누나로 기억이 되는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 출생으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가산을 털어 흥호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 전개한 계몽운동가이자 실력자를 양성해 국권 회복을 달성하려 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1916년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고,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습니다.
1919년 3월1일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3.1 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유관순 열사는 여기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참여를 했고,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습니다.
학생들이 대거 시위운동에 참가를 하자 조선 총독부는 3월 10일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렸으며, 이에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아버지와 마을 유지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시위 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세웁니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습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으며 유관순 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본 일본 헌병대들이 총검으로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진압했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자신의 눈앞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보면서도 유관순 열사는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헌병 주재소로 항의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주도자로 체포가 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고, 이곳에서 공주 영명학교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5월 9일 유관순 열사는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3년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당시 법정에서 그녀는 일본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이후 유관순 열사는 공주 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이 됩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도 그녀의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는데요.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은 후 그녀는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이에 3천여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소리가 퍼져나갔고, 이로인해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될 정도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한 유관순 열사를 가만히 놔둘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로 오기 전에도 갖은 고문을 겪었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서 너무나도 끔찍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17세. 그녀가 받았다는 끔찍한 고문 기록들을 살펴보면
- 머리에 콜타르를 발라 가발을 벗기듯이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 내기
- 면도칼로 귀와 코를 깎아내기
- 펜치로 손톱과 발톱을 강제로 뽑아내기
- 위에 호스를 직접 연결해 뜨거운 물, 변, 다수의 칼날을 강제로 주입하기
- 입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주입시켜 몸 일곱 개의 구멍으로 흘러나오게 하기
- 뜨겁게 달군 쇠로 음부를 지지기
- 다른 독립 열사들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 도려내기
- 물이 든 독 안에 알몸으로 가둔 후 미꾸라지를 풀어놓기
-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나무 상자에 긴 대못을 박아놓고 3일간 가둬놓기
- 상체를 탈의시킨 후 채찍으로 후려치지
- 많은 일본인들이 보는 앞에서 목에 개줄을 묶은 후 네발로 기어 다니게 하기
이밖에도 다양한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할 정도의 고문들을 그 어린 나이에 다 받았다고 하니 눈물이 납니다.
이 중에서 여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웠을 성고문. 그중에서 가장 악랄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고문.
바로 미꾸라지 고문이었습니다.
이 고문은 일본의 여러 잔인한 성고문 중에서도 가장 최악으로 평가받고 있고, 일본이 필사적으로 은폐 작업을 해 현재 정식적인 고문 기록에는 빠져 있는 고문입니다.
미꾸라지는 습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해 구멍이 있으면 들어가려는 습성이 있는데, 이를 일본 고문관들이 이용을 하는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를 알몸으로 독에 가둔 후 물에 미꾸라지를 풀어넣는 것입니다.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이 고문을 17세 소녀가 당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놀라운 사실은 유관순 열사를 고문하는데 당시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있던 친일파 정춘영이 주도하여 다수의 고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정말 분노가 끓어오르는데요. 참고로 정춘영의 만행은 1949년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 위원회에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피어보지도 못한 18살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녀의 사인은 무차별적 성고문으로 인한 방광과 자궁의 파열이었다고 합니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이화학당 교장 월터가 이 사실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이에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마지못해 인도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서훈 등급 3등급에 해당하는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 되었습니다.이 부분도 너무나 분통이 터지는 부분입니다.
얼마 전 건국 훈장이 박탈된 친일 반민족 행위자 김성수도 2등급에 추서가 되었는데,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도 2등급인데, 유관순 열사 같은 분이 3등급이라니.
많은 사람들이 유관순 열사의 서훈 등급을 최고 등급으로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2019년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정말이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추가 서훈 관련 기사를 보던 중 유관순 열사가 한 게 뭐가 있어서 최고 등급의 서훈을 주느냐는 댓글을 심심찮게 봤습니다. 물론 관종들의 댓글일 수 있지만, 그 댓글을 쓴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 당시에 당신은 목숨을 걸고서 만세운동을 주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1시간, 아니 10분이라도 저런 끔찍한 고문을 참고 견디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는가?"
유관순 열사는 유언을 이렇게 남기셨다고 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당시 17세의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을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보다 나라를 잃은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한 유관순 열사.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유관순 열사와 수많은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일제의 만행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조국을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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