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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가장 치욕스러운 패전 용인전투

 

칠천량 해전과 더불어 임진왜란 최대의 굴욕적인 패전이 용인 전투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치욕의 패전이 용인 전투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전투에서 패배했으면 이렇게 불릴까요? 얼마나 참담한 결과가 나온 전투였을까요? 한번 알아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592 일본군은 15만 대군으로 부산에 상륙해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으로 북상했습니다.

 

원균이 개전초 일본군을 막지 않은 채 70여 척의 판옥선을 자침 후 군대를 해산시켜버렸고, 별 준비가 되지 않았던 조선을 일본군은 아무 저항 없이 공격했고, 경상도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왜군을 막기 위해 신립은, 한양을 지키던 군대까지 이끌고 충주로 진격했습니다.

 

신립은 일본군을 너무 얕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왜군이 조총을 쏜들 다 맞겠소?"하고 신무기를 다소 얕보았습니다. 그는 배수진을 치고 뒤에 보병을 세워둔 채 기병만 이끌고 돌격을 합니다.

 

 

궁기병들은 처음에는 꽤 타격을 입혔지만, 일본군이 포위망을 줄여오자 말들이 뛸 장소가 없어졌고, 기병들은 전멸했습니다. 뒤에 있던 보병들은 신립이 배수진을 친 탓에, 도망을 가려면 깊고 깊은 강을 헤엄쳐야 했고 결국 도망가다가 익사하거나 전사하였습니다. 신립 또한 부하 장수 김여물과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습니다.

 

이 전투가 탄금대 전투입니다.

 

신립에게 한양의 군대를 비롯해 전 군을 준 탓에 수도까지 텅 비었고, 왜군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걷기만 해도 열흘이 걸리는 길을 전투를 하면서도 보름 정도 걸려 도달했습니다.

 

왜군의 북상 속도는 가히 기록적이었습니다.

 

무조건 앞만 보며 달려간 적은, 후방 방비가 허술할 텐데요. 거기에 더해 일본군은 전라도, 충청도로는 진격하지 않아서 다행히도 두 곳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질서가 유지되어 있었고, 대군을 꾸릴 만했습니다.

 

이광

 

그래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적의 배후를 요격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먼저 8천 근왕군을 겨우 모아서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급조된 군대라 사기도 형편없고 싸울 의지도 없는 군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진격의 의미가 없다 생각하여 군대를 해산 후 전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광은 나름 대규모의 군대를 꾸려서 갔지만 성과 없이 병사들의 불만만 가득하게 해서 돌아오자 주변의 엄청난 눈치를 받습니다.

 

이에 이광은 병사들을 더욱 모아 다시 진격하기로 합니다. 전라도에서 무려 4만의 병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군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충청도 순찰사 윤성각의 8천과 경상도 김수의 군사 100명도 함께해 무려 5만의 대군을 이루었습니다.

 

 

개전 이래 조선이 모은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이 일본군을 치기 위해 북상합니다. 군수물자를 실은 수레의 행렬이 50리에 달할 정도였다고 하니 기세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10만대군이라 칭하며, "남도근왕군","삼도근왕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급조된 농민 군대였으며, 이들의 긴 행진은 봄놀이 가는 무리 같았습니다.

 

심지어 피난민 무리로 알고 동행하는 이도 있었다 하니 적을 물리치기 위해 행군하는 군대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편 왜군은 10만 대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당황해하고 있었습니다.

 

와키자카

 

이들을 막기 위해 와키자카야스하루를 파견했습니다. 와키자카는 히데요시를 보호하던 칠본창 중 한 명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장수였습니다. 그는 개전 초 수군 장수였지만, 원균이 도망가는 바람에 조선수군과 싸울 일이 없어 육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겉보기에 대단해 보이는 근왕군은 수원으로 향했고, 조선의 대군을 본 왜군은 수원을 버리고 용인에 있던 부대와 합류합니다.

 

왜군이 도망가는 모습을 본 근왕군의 사기는 최절정에 이르렀으며, 용인에 있는 왜군의 공격에 대한 작전회의가 열렸습니다.

 

 

권율 장군은도성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데, 그대로 임진강까지 진군하여, 적과 일전을 벌여야 할 것이오라며 한양을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에 무지한 문신 출신 이광은 권율 장군의 의견을 무시하고 용인으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선봉으로 여진을 정벌해 유명해진 백광언과 이지시가 선발되어 1000 명의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소수의 적을 보자 불리한 지형으로 기어코 들어가 전투를 치르다 전멸했고, 이광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광은 후속 대응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니 끼니 때가 돌아왔고, 근왕군은 방비도 없이 밥을 지어먹고 있었습니다. 이를 염탐하던 왜군은 와키자카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이에 그는 자신의 1600명 군대만을 이끌고 조선 5만 대군에게 돌격합니다.

 

 

밥 먹다 봉변을 당한 조선군은 크게 당황했고, 지휘관을 찾았지만, 이미 그들은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조선군은 먹던 밥도 버리고, 무기도 내팽개치며 살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왜군 역시 당황합니다.

 

그저 깜짝 기습공격을 해본 것뿐인데, 5만 대군이 이렇게 쉽게 도망가버리니...

 

 

와키자카는 당황스러워서 더 이상 공격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근왕군은 더 참담한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추가 공격이 없음에도 살기 위해 전속력으로 도망갔으며, 얼마나 다급했는지 아군끼리 서로 밟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왜군에게 죽은 조선군 숫자보다 압사자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또한 군량을 모두 두고 도망갔기 때문에 굶어 죽은 수도 상당했습니다. 보는 사람도, 전쟁을 치렀을 사람도 어이가 없었을 용인 전투는 조선의 참패로 끝나버립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 와중에도 권율은 휘하 부대를 잘 인솔해 이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용인 전투에서 근왕병이 버리고 간 물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이것을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합니다.

 

용인 전투 이후 와키자카는 한순간에 일본군 영웅이 되었습니다.

 

도요토미는 기뻐하며 그를 본업인 수군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을 마구 짓밟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만난 상대는 이순신 장군이었으니...

 

그나마 한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습니다.

 

1600명에게 5만 대군이 무너진 용인 전투는 칠천량 해전, 쌍령 전투, 현리 전투와 더불어 우리나라 전투사의 흑역사로 이름을 남깁니다.

 

용인 전투의 패배로 선조는 더욱 명에 의지했고, 명은 너무나 쉽게 패한 조선을 보며 일본과 결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 됩니다. 거기에 더해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게 됩니다.

 

승리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패배의 역사 역시 알아야 하며, 반면교사하여 같은 실수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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