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 선생
일제 강점기 모든 것을 다 받쳐 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희생한 독립 운동가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백범 김구 선생이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불렀던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정화 선생은 1900년 8월 서울에서 '양대 판서 집'으로 불리던 대갓집 2남 4녀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양반가 출신인 아버지는 딸을 공부시키지 않았으나 정정화는 오빠의 어깨너머로 천자문, 소학 등을 어려서부터 다 익힌 총명한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자라서 안동 김 씨의 명문가 김가진의 맏아들 김의한과 혼인하였으며 이후 신학문도 배우게 됩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김가진은 대한협회 회장과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19년 3·1만세시위 직후 대동단 총재를 맡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시아버지 김가진은 아들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정정화 선생은 1920년 망명한 남편과 시아버지를 찾아, 친정아버지에게 8백원을 얻어 홀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갑니다. (이 당시 1원은 현재 3~6만원 정도의 가치라고 합니다.)
이후 임시정부에 합류한 선생은 임시정부의 살림을 시작하게 됩니다
선생은 중국 생활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은 물론 이동녕,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삶이 그녀의 손에 달렸다 할 만큼 부지런하고 그리고 알뜰히, 돌보고 보살폈습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1930년까지 10여 년간 6회에 걸쳐 국내로 밀파되었으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은 크게 손상이 되었고, 국내외 동포들의 재정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1925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 사면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내각책임제 정부인 국무령제로 바꾸었습니다.
1926년 말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집단지도체제 형태인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겨우 임시정부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같이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수발을 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 당시 김구 선생도 여기저기 다니다 배가 출출해지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면서 찾아오곤 하였다고 합니다.
1932년 윤봉길 선생의 훙커우공원 의거 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8년간 5000km가 넘는 대장정을 했는데, 이때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서 흔들리는 임시정부를 지켜낸 분이 정정화 선생입니다.
이런 선생을 보고 백범 김구는 한국의 잔다르크라 칭송했습니다.
1935년에 임시정부의 한국국민당에 가입해 공식적인 단체 활동을 하였으며, 1940년 충칭의 한국독립당 광복군 창립에 남편과 같이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간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위한 3·1유치원 교사도 하는 등 항일 민족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한 선생이었습니다.
1943년에는 이념을 넘어 각 정파의 여성들과 힘을 합쳐 대한 애국 부인회를 재건하는 데도 앞장서셨습니다.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들의 각성과 협력을 촉구하였으며,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의 독립군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1945년의 광복을 만주에서 맞은 선생은 임시정부의 요인들의 귀국을 돕고 뒤처리를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이렇듯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정정화 선생이었지만 해방 이후 그 공을 인정받기는 커녕 6.25 한국전쟁 당시 남편은 납북되고, 자신은 서울에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부역죄로 고소되는 고초를 겪게 됩니다.
이후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선생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선생은 납북되었던 남편을 보지 못하고 이산가족의 한을 풀지 못한 채 1991년 돌아가셨고,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안살림을 도맡으며 임시정부 요원들을 책임졌던 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 선생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선생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그분의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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