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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고려 거란 전쟁의 영웅 양규 장군

 

2차 고려와 요나라 전투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장수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양규 장군입니다.

 

양규 장군

 

고려 최상의 무장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척준경. 소드마스터라 불리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유명한 척준경과 고려 초 왕건의 치트키 역할을 한 유금필, 13인의 미니 기병대로 몽골군에 돌격한 김경손.

 

고려 시대에 유독 무쌍을 찍은 장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양규 장군 역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려의 명장이자 소드마스터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입니다.

 

양규장군은 고려 현종때의 무장으로 강감찬이 북방을 순찰하던중 눈에 띄어 병사에서 장수로 등용된 인물입니다.

 

거란 성종

 

1010년 거란의 성종은 강조의 난을 빌미로 40만의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해왔습니다. 이 당시 거란은 동북아 최강대국으로, 문화 수준도 높았던 국가였습니다.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 후 흥화진에 도착합니다.

 

이때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고려의 장수가 순검사 형부낭중 양규 장군이었습니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포위한 후 맹렬하게 공격을 했지만 양규 장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수천의 군대로 7일간 40만 대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냈습니다.

 

 

더이상 흥화진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거란의 성종은 20만 대군으로는 계속 흥화진을 포위 공격하게하고, 나머지 20만을 이끌고 통주로 남진을 했습니다.

 

 

이때 통주에는 고려의 새로운 권력자 강조가 30만의 고려 대군을 이끌고 부대를 세 곳으로 나눠 진을 펼친 상태로 거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고려군이 거란 기병을 무력화 시키는 전법을 구사해 전투는 초반 고려쪽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첫 전투의 승리로 강조는 거란군을 우습겨 보고 안일한 마음이 생긴것인지, 이후 거란군대의 급습에 방비하지 못하고 본진을 점령당했고, 그 자신도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강조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대패를 한것입니다.

 

이날 목이 베인 고려군의 숫자만 3만에 이를만큼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강조 휘하의 수많은 고려 장수들도 목숨을 잃었고, 포로로 잡힌 강조는 세번에 걸친 회유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강조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거란 성종은 양규장군에게 강조가 작성한 것처럼 꾸며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양규 장군

 

그러나 양규 장군은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 라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계속해서 결사항쟁을 합니다.

 

1010 12월 거란군은 남진하여 서경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은 흥화진에서 정예병 700명을 선발하여 결사대를 만든 후 그들과 함께 거란 20만 대군의 포위망을 뚫고 통주로 향합니다.

 

이때 통주에 숨어있던 패잔병 1000명이 양규 장군에게 합류합니다.

 

 

군사가 1700명으로 늘어난 양규 장군은 거란군 6000명이 주둔하고 있는 곽주성을 급습해 함락시킵니다.

 

거란군 6000명을 모조리 죽이고, 포로로 잡혀있던 고려 백성 7천여명을 구출해 통주로 옮겼습니다.

 

곽주성의 수복은 고려군에 큰 의미가 있었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거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거란의 수중에 곽주성이 계속 있었다면 보급로를 확보한 거란군의 공격으로 인해 고려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을 것입니다.

 

 

이 당시 고려의 상황은 거란 성종의 군대에 의해 서경성이 함락되었으며, 고려의 왕 현종은 나주로 피신을 한 상태였습니다. 1011 1 1일 거라군은 고려의 황도인 개경마저 점렴하고 성을 불태워버립니다.

 

이렇게 전황이 위급하자 고려의 대신들은 왕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의 반대로 인해 항복은 무산이 됩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은 다른 방법으로 사신을 보내 친조를 청했고, 거란의 성종 역시 이 구실로 고려인 포로 수만을 인질로 잡은 후 군을 퇴각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거란군도 장기적인 전투와 양규 장군으로 인해 보급로가 멀어진 상황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거란 퇴각 소식을 들은 양규 장군은 이대로 거란군을 보내면 그들이 재침할것이라 생각해 퇴각하는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1011 1 18일 양규 장군은 무로대(의주)에서 급습하여 거란병 2천의 목을 베고, 백성 3천명을 구했고, 1011 1 19일 이수에서 거란을 공격하자 모조리 도망을 갔는데, 추격하여 거란병 25백의 목을 베고 백성 천명을 구했습니다.

 

1011 1 22일 여리참을 급습해 거란병 1천의 목을 베고, 백성 천명을 구해냅니다.

 

여러차례 공격으로 양규 장군은 수많은 거란 군을 죽이고, 고려 백성들을 구해냈습니다.

 

이동안 양규 장군은 6번을 싸우면서 2천 병사중 절반 가까이를 잃었고, 거란군 1만의 목을 벤 고려 김숙흥 장군의 병력이 2천 정도 있었습니다.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이 합세해 그들의 군세를 보니 3천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의 의지를 꺽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쯤에서 그만둬도 양규 장군의 공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는 그만두지 않고 잡혀가는 고려 백성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데도 말이죠.

 

1011 1 28일 퇴각하는 거란 선봉부대가 애전(영변)에 이르렀을때 양규장군의 부대는 급습하여 거란병 천명 이상의 목을 베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거란 성종이 이끄는 본대가 양규 장군의 군대를 공격해왔습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이날의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칼의 날은 무뎌지고, 화살까지 다 하자 한명의 거란 병사라도 더 죽이기 위해,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양규장군과 결사대는 거란 진영으로 돌격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온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박혀 모두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던진 것입니다.

 

양규장군과 그 휘하 병사들의 활약에 고무된 흥화진의 병력들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압록강을 도하하던 거란군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이에 수많은 거란군사가 물에 빠져죽었고 항복했던 모든 성을 수복할 수있었습니다.

 

고려사에 적혀있는 양규 장군의 활약상을 알아보면

 

"양규는 후원이 없는 외로운 군사로써 순월 동안에 무릇 일곱 번 싸워 글안(거란) 군사를 매우 많이 죽였으며, 사로잡힌 사람 3만여 명을 빼았고, 낙타,,무기를 얻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글안의 군사가 침입하니,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와, 부지휘 김숙흥등이 앞장서서 싸워 연달아 적을 물리치고, 몸에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박혀, 모두 진중에서 죽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이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의 다투어 도망쳤고, 6향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하였다. 이로써 성과 진이 보전되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양규의 전투 소식과 경과에 대해 소식을 들은 고려 현종은 피신해 있던 나주에서 개경으로 다시 돌아온 후 거란과 맺은 굴욕적인 약조를 폐기했습니다.

 

이에 거란 성종은 대노하지만, 양규 장군으로 인해 피해를 입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 종결 후 현종은 양규장군에게 공부상서를 추증하였으며, 부인 은율군군 홍씨에게는 교서와 함께 양곡 100석을 하사합니다. 그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에 제수되었습니다.

 

1019년에 공신녹권이 내려지고, 1024(현종 15)에 삼한후벽상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문종 12년에는 김숙흥,강민첨과 함께 양규 장군의 영정이 공신각에 걸렸습니다.

 

적은 병력으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끝까지 전투를 치른 고려 무쌍 양규 장군.

 

이런 장수가 강감찬 장군이나 서희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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