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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몸으로 폭탄을 들고 독립운동을 한 안경신 열사

 

"태어날 아이에게 독립된 나라를 선물해주고 싶다" 며 임신한 몸이었지만 치마폭에 폭탄을 감추고 일제의 만행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안경신 열사입니다.

 

1888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난 안경신 열사는 1919년 평양에서 열린 3·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1개월간 구류를 살았습니다.

 

이후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으로 그 당시에는 큰 금액이었는 2 4백 만원의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1920년 초 동지 106명이 일본경찰에 잡히자 안경신 열사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갑니다.

 

 

좀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려고 마음 먹은 안경신 열사는 대한광복군에 들어가 총영본부에 가담하여 결사대의 일원이 됩니다. 결사대원 중 여성은 안경신 열사가 유일했습니다.

 

안 열사는 광복군에 들어가면서 "나는 3.1 운동때도 참여했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나는 일제침략자들을 그들의 섬나라로 철수시킬 방법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바로 무력적인 응징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알리기 위해 광복군은 서울과 평양, 신의주에 폭탄을 사용한 거사를 계획하게 됩니다.

 

1920 8월의 미국의원단 일행이 방문할때 국제여론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광복군총영에서 국내에 결사대를 3개조로 나눠 파견합니다.

 

장덕진, 박태열 등과 함께 제 2대에 참가한 안경신 열사는 5월에 도보로 상해를 출발해 8 1일 평양에 도착합니다.

 

평양경찰서

 

이들은 8 3일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청사 일부가 파괴되면서 일제 경찰 2명이 폭사합니다.

 

매일신보가 이날의 사건에 대해 남긴 기사입니다. “평양에서는 폭탄 사건이 일어나서 매우 소동되며 평양 천지는 가위 물 끓듯 했다

 

평남 도청 폭파 후 일제의 경계가 삼엄해지자 다음 목표였던 평양경찰서로 가는 것은 임산부인 자신이 가야 의심을 받지 않고 거사를 달성할 수 있다고 하며 안경신 열사는 폭탄을 숨겨 홀로 평양 경찰서로 향합니다.

 

임산부인 그녀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않은채 다음 목표물에 접근할 수 있었고, 폭탄을 투척합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아 도화선이 빗물에 젖어 불발이 됩니다.

 

 

이후 안경신 열사의 동료들은 무사히 귀환했지만, 임신중이었던 안 열사는 귀환에 실패하고 국내로 몸을 피신하였고,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호상리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7개월 뒤인 1921 3월 은신처로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체포되고 맙니다.

 

평양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아이를 출산한 안열사. 당시 태어난지 2주가 채 안된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재판장에 들어섭니다.

 

안경신 부인 사형선고 신한 민보 1921.07.14

 

그녀는 1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됩니다.

 

안경신 사형이 징역 10년 매일신보 1922.04.10.

 

이후 임시정부는평남도청 폭탄 사건은 임시정부 특명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안경신은 전혀 무관하니 석방하라는 내용의 투서를 보냈고 사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게 됩니다.

 

당시 법정에서 안경신 열사는 “조선 사람이 조선 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 면서 재판정을 향해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후 8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가출옥 석방이 되어 평양에 있는 오빠를 찾아가는 안열사. 수감생활 중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자신이 낳은 아이도 영양실조로 인해 시각장애인이 되어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그녀의 동료들 역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경신 열사는 절망합니다.

 

 

여기까지의 행적은 아 수 있지만, 이후 안열사의 행적은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 열사의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아, 당시 신문에 실렸던 그녀의 초상화만이 유일하게 남은 그녀의 모습입니다.

 

안경신 으로 검색을 했을때 검색되는 사진이 있지만, 이는 전혀 다른 인물로 동명이인 입니다.

 

임신한 여성의 몸으로 폭탄을 투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안경신 열사.

 

정부는 1962년 그녀의 업적을 기리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나 그녀의 유족에 대한 정보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전달하지 못한 상태로 있습니다.

 

사진도 한장 남기지 못했지만, 그녀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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