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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처선

 

진정한 사내 대장부였던 내시 김처선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 연산군이 아무리 폭정을 휘둘러도 그 잘난 양반, 사대부들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충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우습게 보았던 내시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연산군의 포악 무도함에 대해 직언을 올렸으니. 그가 바로 내시 김처선입니다.

 

 

김처선은 세종대왕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의 왕을 섬긴 인물로 내시 중에서는 최고위였던 판내시부사 겸 상선을 역임한 조선의 환관이었습니다.

 

그는 세종 시절 내시가 되었고, 이후 문종때 처음 유배 되었다가 또 복직이 되고, 이후로도 몇 차례 유배가 되거나 관직을 삭탈 당하고 복직 되는등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입니다.

 

 

성종대에 대비를 치료하는데 공을 세워  다시 인생 역전하여 정2품 자헌대부에 올라갔습니다. 여러 왕을 모신 그는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한 내시였습니다.

 

연산군 즉위 후 그는 연산군의 시종이 되었는데요.

 

 

1505년 연산군이 음란한 춤인 처용희를 추며 방탕한 놀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직간합니다.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겨왔으나 고금을 돌이켜도 이토록 음란한 왕도 없었사옵니다." 라고 말이죠.

 

이 말을 듣고 가만 있을 연산군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화가난 연산군은 직접 김처선을 향해 활을 쏘았고, 쓰러진 김처선의 다리를 자르고 다음으로 혀를 잘랐습니다.

 

 

연산군이 칼을 휘두를때마다 김처선에게 "용서를 빌면 살려주겠다" 고 하였지만 김처선은 끝내 직간을 계속 하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대소신료들은 죽음이 두려워 하지못했던 행동을 평소 내시라 무시했던 김처선은 하고 만 것입니다.

 

연산군은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에게 직언을 했던 김처선을 극도로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김처선이 죽은 후에도 계속 그와 관련된 것들에 복수를 했습니다.

 

그의 양아들 이공신을 처형하고 7촌 관계의 친족들까지 벌을 주었고,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갔던 '' 자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그로인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처용무의 이름까지도 풍등무로 바꾸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김처선 부모의 묘까지 헐어버리고, 집은 밀어버린 후 연못을 만들어 버립니다.

 

전국에 있는 김처선이란 동명이인들의 이름을 개명하게 했으며 권벌이라는 사람이 과거 시험에서 처()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하는 사례'까지 발생합니다.

 

자신에게 바른 말을 한 충신에게 가한 연산군의 옹졸하고, 치졸한 복수였습니다.

 

김처선이 목숨을 걸고 한 충언도 가뿐히 무시했던 연산군은 이후 중종반정으로 왕에서 쫓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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