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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함포 해전이었던 진포대첩과 최무선

 

세계 해전사에서 최초로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돼 함포 공격을 감행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고려군이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진포대첩이 바로 그 전투인데요.

 

 

고려말 너무나 빈번했던 왜구의 침탈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이러한 왜구를 화포를 이용해 물리친 전투가 진포대첩입니다.

 

 

진포대첩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때 사용한 화약무기를 발명한 최무선을 알아야 합니다. 고려말 왜구를 크게 물리친 진포대첩과 최무선에 대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최무선

 

먼저 최무선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이용해 무기를 만든 발명가이자 장수입니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밝고 총명했고, 일찍이 병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화통도감이라는 고려 최초의 화약 무기 제조 관청을 세웠고, 이렇게 만든 화약 무기로 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인물입니다.

 

최무선은 왜구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 침입해 곡식을 약탈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찍이 화약 연구에 뜻을 두었고 벼슬길에 나선 뒤에도 화약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당시 고려에는 화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불꽃 놀이에나 쓰는 것이 화약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화약을 구할때도 수입을 하면 되는 것을 힘들게 국내 생산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시하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최무선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최무선은 뜻을 굽히지 않고, 화약을 만드는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화약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화약 재료를 구하기부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중 염초는 화약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재료인데, 구할수가 없었습니다.

 

최무선은 고려 최고 무역 항구인 벽란도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화약 재료를 구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던 중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습니다.

 

 

1377년에 그의 건의로 고려에 화통도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최무선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화약과 화포와 같은 화약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장군, 이장군, 화포, 신포, 화통 등의 총포는 물론이고 화전, 철령전, 피령전 등의 발사물이 만들어졌습니다. 질려포와 같은 폭탄, 주화 등의 로켓 화기, 신호탄 등 독창적인 무기도 개발되었습니다.

 

고려말 1350년부터 40여년 동안 약 500회나 왜구가 고려를 침략해왔습니다. 매달 한번 정도는 쳐들어 왔을 정도로 빈번했고, 고려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고려말 왜구의 만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을 능가했을 정도라 합니다. 무수히 많은 고려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았고, 그들이 지나간 곳은 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1380 8월 왜구들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곡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 지금의 금강 하류 지역으로 침입해 왔습니다. 왜구의 군사 규모는 대략 배 한 척 당 20에서 50명 정도 승선할 수 있다 가정하에 최소 1만에서 많으면 3만 정도나 되는 대규모 병력이었습니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일부 병력을 남겨둔 채 육지를 돌아다니며 곡식을 비롯한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구들로 인해 고려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에 나뒹굴었으며, 왜구가 노략질한 곡식을 질질 끌며 운반하다 보니 땅에 널브러진 곡식들도 수북했다고 합니다.

 

왜구의 대함대가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은 고려 정부는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그리고 최무선의 지휘 하에 왜적 소탕을 위해 화약과 화약무기가 실려있는 100척의 함대를 보냈습니다. 고려 함선이 진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군에게 화약이 있는지 모르고 있던 왜구들이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고려군에 달려들었고 이때 최무선은 그곳을 향해 화전과 화통, 화포를 집중 사격하였습니다.

 

진포대첩

 

그 결과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불태워버렸고, 왜구는 대부분 타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해냈습니다.

 

이 전투가 세계 최초 함포 해전인 "진포대첩" 입니다.

 

진포대첩은 1350년 왜구들이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에 고려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이며, 대 왜구 투쟁에서 황산대첩과 더불어 고려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습니다. 진포대첩으로 인해 모든 배를 잃은 왜구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당하였습니다.

 

이성계

 

이러한 이유로 왜구는 내륙 쪽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전에 쳐들어와 내륙에 있던 다른 왜구들과 합세하여 그 숫자까지 늘어났으며, 그 기세가 대단해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에 승리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고려 정부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장군 이성계에게 왜구 토벌을 명하였고, 1380 9월 남원 운봉에서 왜장 아기발도가 이끄는 왜구들을 소탕하였으니 이 전투가 황산 대첩입니다.

 

이성계는 황산 대첩의 승리로 고려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 되었고, 민심을 얻게 되면서 훗날 조선 건국을 위한 기틀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진포 대첩 이후로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진포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돼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레판토해전

 

세계 최초로 함포를 사용한 해전이라고 알고 있는 1571년 레판토 해전보다 진포대첩이 무려 191년이나 빠릅니다.

 

이는 최무선이 화약 및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남들보다 일찍 알고, 개발하여 실전배치를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의 노력이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해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무선이 노력해 만든 화통도감은 고려 창왕 때 사라집니다.

 

그리고 최무선은 1395 4월 사망합니다.

 

 

최무선에게는 최해산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최해산이 아버지의 화약 제조법을 습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최무선의 노력은 사라지지 않고 최해산을 통해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방기술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는 왜군이 조총으로 조선군을 압도해 침략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이 화포를 이용해 왜군을 압도하며 바다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는 최무선의 화약제조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최무선의 집념과 노력은 그가 살아 있던 당시 왜구로부터 고려를 구했고, 그가 사망한 후 200여년 뒤 다시 한번 더 임진왜란 때 일본군으로부터 조선을 구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최무선이 화약을 개발한 역사적인 그날이 있었기에 일본은 우리의 바다를 함부로 침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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