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판 장비, 왕건의 최측근 박술희 장군
삼국지 유비에게 장비가 있었다면 고려 왕건에게는 고려판 장비였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박술희 입니다. 왕건에 대한 절대적 충성만 알았던 박술희.
태조 왕건의 최측근이었지만, 왕건의 아들들과 사촌 형제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는 박술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술희는 면천 박씨의 시조로 고려전기의 무신이자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의 최측근 장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용감했으며, 먹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식성도 좋았고 육식을 즐겼습니다. 소,돼지,닭고기,뱀은 기본이요 심지어는 두꺼비, 개구리, 개미도 먹어치웠다고 전합니다.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으로 들어가, 후에 태조를 섬기는 무신이 되었습니다.
왕건 밑에 배속이 된 후 엄청난 공훈과 무훈을 세우며 왕건의 최측근으로 발탁이 됩니다.
이후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인물로 정치보다는 군무에 더 적합한 장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정치를 하는 것 보다는 전쟁터에 있는 시간이 많았으며 전쟁터에 나가면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박술희는 왕건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신숭겸과 같이 왕건에 대한 충심이 가득했던 장군입니다.
왕건의 후사로 다들 이리저리 말들이 많았을 때 유일하게 왕건의 의중을 깨닫고 왕건의 장남인 왕무를 밀어 태자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무의 태자 책봉 과정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그의 생모 오씨의 집안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인데요. 태조는 태자들이 입는 옷감인 자황포를 상자에 담아 오씨에게 주었습니다. 오씨는 다시 이를 박술희에 게 보여줍니다.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무를 태자로 책봉 할 것을 청했습니다.
무가 태자로 책봉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박술희에 대한 태조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얘기가 됩니다.
후에 왕무는 고려의 제2대왕 혜종이 되는 인물입니다.
태조는 재위 26년(943) 4월 죽음을 대비해 써두었던 훈요 10조를 그에게 넘겨주었고, 임종할 때에는 그에게 후사를 부탁했습니다. 이에 박술희는 목숨을 다하여 왕건의 명을 끝까지 이행합니다.
하지만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 왕무는 심성이 유약했으며, 외가의 힘이 약했기에 왕권이 불안정했습니다.
박술희는 왕무의 뒤를 받치기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서경 총관 왕식렴과 왕건의 둘째 아들 왕요(정종),셋째 아들 왕소(광종)에 의해 반역을 음모했다고 모함을 받고 갑곶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맙니다.
사후 태사삼중대광에 추증되었으며, 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오직 주군 왕건에 대한 충심 밖에 없었던 박술희는 주군의 아들들과 사촌형제에 의해 죽음을 맞이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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