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번 VS 당나라. 그리고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
수나라가 망하고 618년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 중국 통일제국으로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당나라는 그 군대도 당시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당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돌궐까지 굴복시키면서 동아시아에서 당나라를 대적할만한 나라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나라의 눈엣가시같은 고구려가 사라지고 당나라가 천하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있을때 서역을 지배하며 당나라를 압박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토번이었습니다. 토번은 티베트의 옛 왕조입니다.
이런 토번의 전정기를 이끈 재상이자 명장이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가르친링 입니다. 재상 가르통첸의 둘째 아들이었던 가르친링은 667년 아버지가 죽자 군권을 이어받았고, 685년 맏형 가르친네가 죽자 재상직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르친링은 50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불패의 토번 장군이었습니다. 토번은 가르친링을 앞세워 그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던 당나라 군대와 여러차례 일전을 치룹니다.
669년 당 고종은 설인귀를 나살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고 토번 공격을 명합니다. 이에 설인귀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토번으로 진격합니다. 토번의 가르친링은 군을 이끌고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에서 당군과 일전을 벌였고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 군은 토번군에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거기에 더해 설인귀를 포함한 여러 당나라 장수들이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이때 가르친링은 포로로 잡힌 당 장수들에게 훈계를 하고 살려보내줍니다. 이후 설인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한때 서인으로 강등당하기도 합니다.
대비천 전투의 패배로 인해 기세등등하던 당나라의 위상이 실추되었습니다.
대비천 전투의 여세를 몰아 670년에 가르친링은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던 서역을 공격했고, 그 결과 당나라 안서도호부에 속한 안서사진이 토번의 영토가 되어 서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토번이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하던 당나라는 678년 이경현과 유심례에게 18만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침공하도록 명합니다. 이번에도 청해호 부근 지역인 승풍령에서 가르친링은 전략을 통해 당군을 섬멸하고 지휘관인 유심례까지 사로잡아버립니다. 승풍령에서 대승을 거둔 토번군은 오늘날 청해성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가 승풍령 전투였습니다.
689년 토번에게 연패하자 측천무후는 위대가를 대총관, 염온고를 부총관으로 임명하고 10만 당군을 주며 토번이 점령하고 있는 서역지방인 안서사진 정벌을 명합니다. 이에 맞서 가르친링은 인식가 강으로 토번군을 이끌고 당군과 대치합니다. 양군이 대치하고 있던 계절이 겨울이었는데, 추위로 인해 당나라 군대가 행군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폭설이 내리자 가르친링은 강을 건너 당군을 기습하였고, 이 공격으로 당군은 대패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었습니다. 이 전투가 인식가 전투였으며, 이 전투의 패전책임으로 위대가는 유배형을 받았고, 염온고는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692년 포기를 모르는 당나라는 서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서 왕효걸에게 정예부대인 금아군 30만을 주며 안서사진을 공격하게 합니다. 왕효걸은 대비천전투때 설인귀와 함께 출병했다 포로로 잡혔던 장수로 누구보다 토번을 잘 알고있고, 원한까지 품고 있던 장수였습니다. 왕효걸의 당군이 공격해오자 라싸에서 내정업무를 보느라 바빳던 가르친링 대신 그의 아우 가르다고리 가 15만 토번군을 이끌고 당군과 조우합니다.
왕효걸의 당군은 토번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안서사진 중 3개의 진을 점령했고 마지막 안서사진인 소륵에서 토번군을 대파한후 안서도호부를 부활시켰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가르친링은 시간을 벌기위해 서돌궐의 아사나뇌자를 포섭해 당군을 공격하게 합니다. 하지만 10만의 서돌궐군은 당군에 6만명이나 죽임을 당하는 대패를 당하고 맙니다. 이 전투로 인해 돌궐의 토번 지원군이 궤멸되었고, 이후 토번을 지원할 세력이 사라지게됩니다.
695년 가르친링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당의 임조를 공격해 격파했습니다. 이에 당은 왕효걸에게 돌궐군과 금아군 30만을 주며 토번을 공격하게 합니다. 앞선 동생의 패전으로 가르친링이 이때 모을 수 있는 토번의 군사는 3~5만 정도였습니다. 당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전투였지만, 두 나라 군대는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고, 토번군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당 측천무후는 696년 1월 누사덕에게 10만의 대군을 증원해 토번을 공격하게 합니다. 696년3월 당과 토번의 군대는 소라한산에서 대대적인 혈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가르친링의 토번군이 당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하여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거두게 되니 이 전투가 소라한산 전투입니다. 당나라 장수 왕효걸은 겨우 목숨만 부지한채 도망쳤고, 패전의 책임으로 평민으로 강등이 됩니다. 소라한산 전투로 인해 당나라 군사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당은 토번과 화친을 맺고 토번을 '서쪽정부'라고 칭할 정도로 위세가 실추되었습니다.
토번은 가르친링의 대당 전쟁 승리로 인해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가르 가문은 토번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가르친링은 대당 전쟁 뿐 아니라 토번내 반란 진압에서도 활약을 합니다.
676년 34대 쩬뽀(토번 왕의 호칭) 망송망첸이 죽은것을 알고 토번의 속국인 샹숭국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가르친링이 진압을 하고 별다른 응징을 하지 않고 마무리하였습니다. 하지만 1년 뒤인 677년 샹숭국은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켜 토번의 백성들을 죽였다. 이에 가르친링은 이를 진압하고 이전과는 달리 반란군을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토번의 35대 쩬뽀인 치둑송첸은 6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인물로 699년 장성하여 왕권강화를 하기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이때 그의 왕권강화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가르가문이었습니다. 치둑송첸은 가르친링을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그에게 사병과 재상직을 내려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가르친링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맙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반란의 명분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가르 가문의 권력은 첸포로 부터 나온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첸포에게 돌아갈 권력이었습니다. 첸포 치둑송첸은 진압군을 보냈고, 진압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군대는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모든 것일 체념한 가르친링은 대를 잇기 위해 장남 가르궁린을 당나라에 망명 보내고 자신은 자결을 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크고 작은 50여 회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은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가르친링이 사망한 후 당과 토번의 관계는 다시 당의 우세로 돌아갔으며, 당나라에 망명한 그의 아들 가르궁린은 당나라 장수가 되어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는 말이 있듯이 연전연승하는 명장이 됩니다.
가르친링의 대당전쟁 활약으로 인해 당나라의 동아시아 통일 야욕은 사라졌고 당나라에 굴복했던 북쪽의 돌궐도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당나라가 토번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사이 당의 속국 취급받던 신라는 조금씩 영토를 확장시켜나가며 당나라를 몰아냅니다.
또한 만주 지역에서는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으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이 일련의 일들은 토번의 가르친링이 당나라 군대를 격파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그가 있어서 토번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까지도 많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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