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였던 부산진 전투.
부산진 전투를 이끌었던 조선의 장수는 정발 장군이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싸웠다 해서 흑의 장군으로도 불리는 정발. 중과부적이었지만 끝까지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정발과 부산진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발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자고 호는 백운입니다. 그는 1553년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서 간성 군수를 지낸 아버지 정명선의 아들입니다. 1577년 선조 10년 별시 무과에서 병과 7위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습니다. 해남 현감, 거제 현령 같은 지방 외관직과 비변사 낭관 등의 중앙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1592년 절충장군의 품계에 오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달 전 부산진 첨절제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이때 부산진 위치는 현재 부산 동구 쪽에 해당합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그날도 정발 장군은 지금의 영도인 절영도에서 훈련을 겸한 사냥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부장 이정헌이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 정발에게 아뢰었다.
"장군 지금 부산진 앞바다에 왜의 배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빨리 확인해보십시오."
이 보고를 들은 정발은 세견선 (조선시대 쓰시마섬 도주에게 내왕을 허락한 무역선)이라 생각하고는
"가끔 있는 일인데 무얼 그렇게 놀라느냐. 조공을 바치는 배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정헌은 "몇 척이 아니라 수백 척의 배가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놀란 정발 장군이 직접 확인을 해보니 바다에 왜군의 깃발을 단 함선이 빼곡하게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견선은 많아야 5척을 넘지 않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함선은 평소의 조공을 하러 오는 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왜군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가 700여 척의 전선과 18700명 병력을 이끌고 온 것입니다.
이에 정발 장군은 성 밖의 백성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군사들을 인솔해 농성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방어 무기라고는 활과 창이 전부였고, 훈련을 제대로 받은 군사들도 많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정발은 전령을 동래성으로 보내 왜군이 침공했음을 알리고 구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전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부산진의 병력은 대략 600명 정도였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새벽. 별다른 저항 없이 부산진 일대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진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왜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요.
고니시군의 선봉은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요시토시였으며, 그가 휘하 병력 5천을 이끌고 정발의 부산진성을 공격했는지 고니시가 직접 본대를 이끌고 공격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5천이든 18700이든 600명의 조선군은 그들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의 왜군과 전투를 치른 것입니다.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진성을 포위한 왜군은 신형 병기인 조총을 앞세워 공격을 했습니다. 조총의 위력도 대단했지만 그 엄청난 발사음에 놀란 조선군은 두려움에 빠져 공황상태가 되었습니다. 최대 30배나 많은 적은 물밀듯이 계속해서 공격을 해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일방적으로 기울어져갔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군 사망자는 급증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부산진성의 백성들은 무기가 떨어지자 기왓장과 돌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며 저항을 했습니다. 그렇게 분전을 했지만 왜군이 성벽을 기어오르고 성문이 뚫려 성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진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에 정발 장군의 부하들이 구원군도 오지 않고 있으니 탈출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얘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의 귀신이 될 것이며 성을 포기하고자 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라며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분전했습니다.
정발 장군의 활 솜씨는 신궁에 가까웠으며 쏘는 화살마다 왜군에게 백발백중했습니다. 부산진성은 이제 치열한 백병전이 진행되었고, 조선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쓰러져갔습니다.
전투는 시작된 지 3시간 만에 왜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부산진성의 항전은 처절했지만 정발 장군과 부장 이정헌을 비롯해 조선군 600명과 성안의 3천 백성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왜군들은 부산진성에 숨을 쉬고 있는 존재들은 모조리 도륙을 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끝이나자 성안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없었다 합니다.
정발 장군은 시신조차 끝내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겨우 그의 갑옷과 투구 조각만을 찾아내 대신 관에 넣어 안장했습니다. 정발은 사후 좌찬성(종 1품)에 추증되었고 충장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부산 동래 충렬사에 제향 되었습니다.
부산진성 전투에 대해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 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승리하리라 생각했던 왜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조선군과 양민들이 중과부적의 상황임에도 그토록 처절하게 항전하리라 생각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전국시대 일본은 군과 민이 분리가 되어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전투는 다이묘나 유력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이었던 데다가 한쪽이 패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패전 측의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졌습니다. 처벌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 및 측근들, 가신, 또는 그 일가 위주로 진행될 뿐이었으며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의 경제력을 증가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말단급 병사나 백성들은 끝까지 항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외침을 이미 경험해봤던 우리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낫이라도 들고 싸웠고, 기왓장과 돌까지 던지며 처절하게 항전했습니다. 그러니 왜군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전투를 하며 한양까지 어떻게 진격할지 걱정까지 했다 합니다.
정발은 잠시나마 전투 전 도주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누명은 곧 벗겨졌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부산진성 전투는 장계조차 올릴 틈 없이 숨 가쁘게 전투가 진행되었고, 부산진성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다 보니 이런 오해를 불러왔는데요. 그날 부산진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산진 전투에서 시체 속에 숨어있다 생존해 포로가 되었다 풀려난 조선군 가은산의 증언과 정발 장군 처의 탄원으로 전란 후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흑의 장군 정발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수십 배에 달하는 적을 맞아 목숨도 돌보지 않고 항전하며 나라를 지키려 한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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