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수호신 백수 최만호 최영 장군
혼란의 시대 고려 말. 외적을 물리치고, 고려를 지키려 노력한 명장이자 재상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최영 장군입니다.
최영의 가문은 문신가문이었지만, 최영은 무신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최영. 하지만 이 말은 최영의 나이 16세에 그의 아버지 최원직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습니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항상 되새기며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벼슬길에 오른 최영은 수차례 왜구를 격파하며 화려한 공적을 세웁니다.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고려를 구하였으며,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였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친원파인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군사 1만을 의주에서 섬멸했습니다.
외침을 막아내고, 내부 반란을 진압하며 고려 왕실을 지키는 충신이 바로 최영이었습니다.
1376년 충청 지역에 왜구가 약탈을 일삼았는데요. 이에 최영은 우왕의 출전 허락을 받고 충청도 홍산에 이르렀습니다. 적과 대치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고려군에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영 장군은 직접 병사들의 선봉에 서서 돌격하여 왜구를 격파했습니다. 최영 장군이 선봉에서 돌격을 할때 왜구가 쏜 화살이 입술에 맞았고,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합니다. 하지만 최영장군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자신에게 화살을 쏜 적을 쏘아 넘어뜨린 후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았고, 이 모습을 본 왜구들은 기겁하며 고려에서 두려워 할 유일한 무장은 하얗게 머리가 센 백수 최만호 라고 말할 만큼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가 바로 그의 생애 가장 대표적인 전투인 홍산대첩입니다.
최영 장군을 크게 신임한 우왕은 최영 장군의 딸을 후비로 맞이하였고, 그는 우왕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최영 장군은 이성계 장군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 함께 참전하며 전우애를 키웠고, 이성계를 크게 신임합니다. 이 두 장군은 백성들에게 고려를 지키는 두 기둥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최영은 뜻밖에도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이성계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의 중국은 원 명 교체기였고, 그 혼란의 여파가 고려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명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중원의 새 주인은 자신들이니 옛 원나라의 영토였던 철령 이북을 요동지방으로 귀속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최영장군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성계가 '4불가론'을 내세워 요동 정벌을 반대하며 두사람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몇 차례의 실랑이가 벌어진 뒤 결국 최영은 요동 정벌을 감행해 출격시킵니다.
서기 1388년 고려 전국 8도에 징발령이 내려졌고, 전투병력 38,830명, 비전투병력(전투지원병력) 11,634명, 동원한 말은 무려 21,682필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가 예비군을 제외한 전 국력을 소비하여 동원한 정예병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백만대군을 보유한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명나라였습니다.
최영장군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남고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군대를 내주어 요동정벌 길에 나서도록 하였습니다. 출병하는 이성계의 머리속은 강대국 명과의 전쟁때문에 복잡했을 것입니다.
1388년 음력 5월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은 국경지역인 압록강 위화도까지 진격하지만 때마침 장마를 만나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무기가 손상되었으며, 군량마저 넉넉치 않아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었습니다.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결국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회군시켜 쿠데타를 일으키니 이 사건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었습니다.
요동정벌군이 회군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장군은 급히 수도 개경으로 철수하고 수도방어를 준비하지만 나라 안의 모든 정예병력, 물자등을 요동정벌군에게 털어주었기에 제대로된 방어준비를 할 수 없었습니다.
1388년 6월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가 개경을 함락시키고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면서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최영장군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노구를 이끌고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을 패퇴시켰지만 수만명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왕궁으로 철수합니다.
자신의 운명이 다했다고 판단한 최영장군은 왕궁으로 들어가 우왕에게 절을 하며 마지막 인사를 한후 스스로 궁밖으로 나가 이성계에게 체포당합니다.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합포로 옮겨졌으며,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당합니다.
최영장군은 처형되는 순간에도 낯빛이 전혀 변하지 않은채 태연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했습니다.
이에 최영장군은 "내가 죄가 있다면 나라에 충성한 죄일 뿐이다. 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의 무덤에는 내내 풀이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해 현재는 무성합니다.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자 대들보인 최영 장군이 죽자 고려도 곧 무너졌습니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는 후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된 고려 최고의 명장이자 충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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