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보루, 삼충신 - 성충, 흥수, 계백
무너져가는 백제를 지키려 노력한 삼충신이 있습니다. 성충, 흥수, 계백을 백제 삼충신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들은 백제 말 나라를 생각했던 신하들이었습니다.
백제 31대 임금 의자왕은 재위 초중반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무산성,감물성 등 신라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고, 신라에게 큰 위기를 가져다 주었으며, 백제의 두번째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해동증자라 불리기 까지한 의자왕. 명군이라 생각했던 의자왕이 자만심에 도취 되어서인지 점점 암군으로 변해갔습니다.
그가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왕권 강화로 인해 귀족층들의 반발을 사면서 백제의 지배층이 흔들렸습니다. 의자왕은 매일매일 궁녀들과 잔치를 벌였고, 주색잡기에 바빠 정사는 돌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바른말을 하는 충신들을 처형하기까지 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이 부분에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정도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백제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700년 역사의 백제를 지키고자 한 충신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백제 삼충신인 성충과 흥수, 계백 장군입니다.
먼저 성충은 정충이라고도 하며 의자왕에 의해 발탁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백제의 기틀을 가지고 국가의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가였습니다.
의자왕 16년인 656년 좌평으로 있을때 암군으로 변하는 의자왕을 보며 사치와 향락을 멈추고 백성들을 돌보라는 충언을 올렸으나, 의자왕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군사전략에 능했으며 좌평으로 있던 흥수도 의자왕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충언을 올렸으나 그 역시 분노한 의자왕에 의해 지금의 전남 장흥으로 유배를 가게됩니다.
충신 성충은 감옥에 갇히며 단식을 하였고, 이로인해 곧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전 의자왕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충 그는 이렇게 죽어가면서 까지도 나라를 걱정했고, 의자왕에게 충언을 올리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의자왕에게는 그의 충언이 들리지 않았고, 간신들의 아첨만이 그를 즐겁게했습니다.
의자왕 20년인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대군, 합 18만 대군이 백제를 침공해왔습니다. 나당 연합군 18만이 백제를 공격했다는 첩보를 들은 백제 조정은 전쟁에 대한 회의를 하였으나,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군사 전략이 뛰어난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묻습니다.
이에 흥수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응하는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넓은 들판에 진을 치고 싸우면 승패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백강과 탄현은 우리의 험한 요새지이므로 마땅히 용사를 가려 보내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사졸들이 피로해질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것입니다.” 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흥수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요. 대신들이 흥수가 의자왕에게 노여움을 사 쫓겨났으니 앙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다.
이로인해 백강과 탄현, 기벌포와 같은 천혜의 요새를 점거해 전투를 치르지 못한 백제는 속수무책으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당하고 맙니다.
간신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적절한 시기를 놓친 의자왕은 결국 마지막 히든카드인 계백 장군을 황산벌로 출정하게 합니다.
계백은 달솔의 관직에 있던 장수였습니다. 이 달솔은 백제의 16 관등 중 두번째로 높은 자리였습니다.
계백 장군은 나당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대 5천명을 뽑아 황산벌로 나아갔고, 자신의 군대보다 10배나 많은 5만의 신라 대군과 조우하였습니다.
그는 이 전투를 나가면 자신이 살아돌아오지 못할것을 알았고, 출정전 자신의 처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힘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겠다.”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으로 처자식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은 그의 행동이 옳바른 행동이었는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계백 장군의 충절에 대한 부분은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전투에 임하는 그의 투지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결연한 의지로 계백 장군은 나당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대 5천명을 뽑아 황산벌로 나아갔고, 자신의 군대보다 10배나 많은 5만의 신라 대군과 조우하였습니다.
계백과 5천 명의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닥뜨린 곳은 논산의 평야 지대인 황산벌이었습니다.
10배나 차이나는 병력으로 인해 황산벌에서 전투가 이루어진다면 전멸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이에 계백은 황산벌 근처 산 쪽에 있는 3개의 산성에 주둔한 뒤 신라와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사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월나라 왕 구천은 5천의 군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가 마땅히 힘을 합쳐 죽을힘을 다해 신라군을 물리쳐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라"
계백의 연설에 백제 결사대의 사기는 올라갔고,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신라군과 네번을 싸워 4번 모두 승리를 했습니다.
신라 김유신은 손쉽게 승리하리라 생각을 했을테지만, 계백과 그의 5천 결사대는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를 임했고, 그로 인해 신라를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인해 신라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당나라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라에게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때에 신라에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나라를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젊은 화랑인 반굴과 관창이었습니다.
먼저 반굴은 신라 장군 흠순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흠순에게 신하로서 충성하라는 말을 듣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합니다.
또다른 화랑 관창은 신라의 장군 품일의 아들로 그때 나이 16세였습니다. 관창은 반굴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백제군에 나아가 싸우다 생포되었습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신라진영으로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전투준비를 하고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습니다. 계백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신라의 화랑 반굴과 관창을 보며 자신의 조국 백제의 패배를 예감했습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예상대로 신라군은 반굴과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랐습니다. 사기가 오른 10배나 많은 신라군을 상대해야 했던 계백과 그의 결사대.
결국 계백과 결사대는 신라군에 의해 황산벌에서 전멸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결사대는 백제에게는 사실상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이들이 패전하자 백제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나와 옛 도성인 웅진성으로 피난하면서 성충과 흥수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군사를 모아 나당연합군에 맞서보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복하면서 백제 700년 역사는 끝이납니다.
자신보다는 나라를 생각한 삼충신 성충, 흥수, 계백. 현재 부여에서는 이들을 삼충사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쇠퇴해가는 조국 백제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삼충신 성충, 흥수, 계백.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역사적 그날에 의자왕이 성충과 흥수의 충언을 새겨듣고 계백장군으로 하여금 백제를 지키게 했다면, 700년 역사의 백제는 그렇게 허망하게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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