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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부인

 

29명의 부인을 둔 태조 왕건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부인이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29명에 이르니... 정말 많은 부인을 두었는데요.

 

고려 왕들은 다 부인을 많이 뒀을까요? 고려 왕들의 부인의 숫자를 평균치로 계산해보면 3.2명에 불과합니다.

 

 

왕건만큼 많은 부인을 둔 고려 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왕건은 왜 이렇게 많은 결혼을 했을까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왕건은 유력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 정책을 펼쳤던 것입니다.

 

 

29명의 부인들은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었습니다.

 

호족들 입장에서도 자신의 딸을 태조 왕건과 혼인시킨다는 것은 훗날 최고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는데요.

 

 

1비 부터 제29비 까지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1비: 하동군부인(건국 전) > 신혜왕후 유씨
  • 2: 장화왕후 오씨
  • 3: 신명왕태후 유씨
  • 4: 명복궁대부인(황주원부인) > 신정왕태후 황보씨
  • 5: 대량원부인 > 신성왕태후 김씨/이씨
  • 6: 정덕왕후 유씨
  • 7: 헌목대부인 평씨
  • 8: 정목부인 왕씨
  • 9: 동양원부인 유씨
  • 10: 숙목부인 임씨
  • 11: 천안부원부인 임씨
  • 12: 흥복원부인 홍씨
  • 13: 후대량원부인 이씨
  • 14: 대명주원부인 왕씨
  • 15: 광주원부인 왕씨
  • 16: 소광주원부인 왕씨
  • 17: 동산원부인 박씨
  • 18: 예화부인 왕씨
  • 19: 대서원부인 김씨
  • 20: 소서원부인 김씨
  • 21: 서전원부인 김씨
  • 22: 신주원부인 강씨
  • 23: 월화원부인
  • 24: 소황주원부인 황보씨
  • 25: 성무부인 박씨
  • 26: 의성부원부인 홍씨
  • 27: 월경원부인 박씨
  • 28: 몽량원부인 박씨
  • 29: 해량원부인 최씨

 

왕건은 한창 전쟁을 할 때는 주로 무장의 딸과 혼인하였고, 후삼국을 통일하고는 신라 왕족의 딸과 혼인을 했습니다.

 

전국에 걸쳐서 29명의 비를 맞이했는데요.

 

 

한 지역에 부인이 여러 명인 경우도 있었고, 경기도 광주의 광주원부인 왕씨와 소광주원부인 왕씨, 동주의 소서원부인 김씨와 대서원부인 김씨는 친자매사이였습니다. 이 경우는 이들의 아비가 두 딸 모두를 왕건과 혼인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29명의 부인들로부터 왕건은 34명의 자식을 얻었습니다.

 

신명순왕후   유씨

 

29명의 부인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비는 제3비이자 정종과 광종의 어머니인 신명순왕후 유씨로 5남 2녀를 낳았습니다.

 

신명순왕후 유씨를 특별히 총애해서 5 2녀라는 많은 자식을 낳았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출신지가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이다 보니 왕건이 더 총애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건이 정치적 이유만으로 29명 전부와 결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장화 왕후  오씨

 

장화 왕후 오씨의 경우 목포에 온 왕건이 오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청혼을 한경우입니다. 왕건을 만나기 전 용이 자신의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오씨는 왕건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니 이가 고려의 두 번째 왕 혜종입니다.

 

왕건이 29명의 부인들을 둬서 고려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지만 순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요.

 

각 지방의 호족들은 자신의 외손자가 왕위에 오르길 바랐고, 이로 인해 왕위 계승 쟁탈전이라는 부작용도 발생합니다.

 

29명의 부인들을 뒀던 왕건. 과연 마냥 부러워할 만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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