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후와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히데요시로 인해 발발하고 히데요시가 사망하며 끝이난 임진왜란.
조선을 피바다로 물들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후는 어떠했는지, 그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에서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에 오른 인물이며 전국시대를 통일한 입지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급 무사였던 아시가루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으며, 그 아버지가 일찍 죽어 계부 밑에서 자랍니다.
히데요시가 16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와 바늘 장수를 하면서 당시 도카이도 지역에서 가장 부강한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마쓰시타 유키쓰나의 부하가 되었지만 뛰어난 일솜씨로 주변 동료에게 시기를 받았고 이를 견디지 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인의 소개로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1560년 오다 노부나가가 수천 명의 병사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만 명의 대군을 물리친 오케하자마 전투가 발발했을 때
하급 무사 아시가루를 통솔하는 아시가루 조장 정도의 지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이렇게 낮은 지위에서 점차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높은 신분이 되었는데요.
오다 노부나가는 출신이나 신분 보다는 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중시한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본인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히데요시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573년 7월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쫓아내 사실상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기노시타에서 하시바로 성을 바꿉니다.
1573년 9월 아자이 가문이 멸망된 이후 오미 북부를 다스리는 다이묘로 봉해졌으며 비호 호수 근처 나가하마에 성을 쌓아 꿈에 그리던 성을 보유한 무사의 지위에 오릅니다.
이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모리 가문이 지배하는 주고쿠를 공격하게 됩니다.
1582년 6월 2일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숨기고 모리 데루모토와 급히 강화를 맺었고 긴키 지역으로 놀랄 만큼 재빨리 회군하여 6월 13일 셋쓰의 야마자키에서 미쓰히데와 싸워 승리합니다
미쓰히데는 모리 가문과 싸우고 있던 히데요시가 이렇게 빨리 회군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해 이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지 않았고,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미쓰히데는 달아났지만 현지 백성에게 잡혀 살해됩니다.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를 자신이 했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권력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1582년 6월 27일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와 영지 분할을 논의하기 위해 오와리 기요스 성에서 회의가 열리는데요.
노부나가의 주요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쓰네오키, 히데요시 4인은 논의 끝에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의 아들인 산포시를 후계자로 정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셋째 아들 노부타카를 지지하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대립하게 되고 1583년 4월 마침내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는 일전을 하게 되니 이 전투가 시즈가타케 전투입니다.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결국 승리한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격파한 후 여세를 몰아 가쓰이에의 본거지인 기타노쇼까지 쳐들어갔고 시바타는 이를 막지 못하고 결국 자결하였으며,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도 자결하게 됩니다.
1583년 5월 히데요시는 셋쓰 오사카의 이케다 쓰네오키를 미노 국으로 전봉(다이묘의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시키고
그 지역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게 되고 그해 9월에 오사카성을 축성합니다.
1584년에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히데요시에 대항했지만 히데요시는 그의 장기인 외교전을 펼쳐 11월 노부카쓰와 단독으로 화해를 맺어 이에야스가 계속해서 싸울 명분을 없애버립니다. 그 결과 12월 이에야스도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와 화해합니다.
히데요시는 1584년 11월 22일 종3위 권대납언에 서임받아 조정의 최상급 관인인 공경 반열에 올랐으며 죽을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합니다.
히데요시는 천황의 권위를 활용하는 노선을 계속 유지하였고 1584년 7월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종1위 간바쿠(關白,관백)가 되었습니다.
1587년에는 규슈 평정을 완료하였고 1588년 4월에는 취락제라는 대 저택을 짓고 천황을 초청하고 천황 권위를 빌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29명의 다이묘로부터 충성을 맹세하는 기청문을 받아 정권의 기반을 확고히 합니다.
1590년 히데요시는 자기 휘하의 모든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오다와라 성을 공격하여 호조 가문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합니다.
하지만 1년 후 히데요시의 적자 쓰루마쓰가 요절하며 히데요시는 좌절합니다.
후계가 없던 그는 조카인 히데쓰구를 양자로 삼아 관백의 직을 양도하며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본인은 은퇴한 관백을 뜻하는 다이코 신분이 되어 대외 침략 전쟁에 집중합니다.
이후 정명가도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세우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합니다.
1594년 8월 측실인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히데요리 입니다. 당초 나이가 있어 친자식을 기대하지 않았던 그는 쓰루마쓰를 잃고 조카인 히데쓰구를 정식 후계자로 삼아 도요토미 가문을 이미 물려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데요리가 태어나니 그의 마음은 변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히데요시와 히데쓰구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었고 1595년 7월 히데요시는 히데쓰구를 모반죄로 몰아 자결시키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후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로 하여금 새로 후계자 자리에 오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598년 8월 18일 62세의 나이로 후시미 성에서 사망합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지방의 유력 다이묘인 오대로와 도요토미 가의 가신인 오봉행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한동안 극비로 부친 채 군의 철수를 명령합니다. 이렇게 임진왜란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의 조선에서의 패퇴나 다름없는 철수로 마무리가 됩니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후는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 도요토미 가문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유언에 따라 히데요리와 측실 요도도노는 난공불락의 요새 오사카성으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1600년 9월 1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 10만 명과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 8만 명이 도요토미 정권의 주도권을 놓고 지금의 기후 현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서 일전을 벌이니 이 전투가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임진왜란 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 최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리를 지지하던 서군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패하자 히데요리는 셋츠 국, 가와치 국, 이즈미 국에 65만 7석의 영지를 보유한 다이묘로 전락하게 됩니다.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후견인의 역할을 하며 오사카 성의 실권을 행사합니다.
히데요리를 다이묘로 쫓아낸 후에도 그의 존재가 항상 마음에 걸렸던 이에야스는 ‘종명사건’을 계기로 히데요리를 없앨 기회를 잡습니다. 종명사건이란 히데요리가 호코지 재건당시 그 절의 범종에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는데 이는 도쿠가와 가문을 저주하기 위해 새긴 글귀라며 트집을 잡았고 이를 명문으로 히데요리의 오사카성을 공격합니다.
오사카 전투는 1615년 겨울과 1616년 여름,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 도요토미 가문의 운명이 걸린 이 전투에서 히데요리는 총대장이었으나, 안전을 먼저 생각한 어머니 요도도노의 지시에 따라 성을 지키는 병사 앞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히데요리는 자신의 정실 부인이자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를 중개자로 하여 구명을 청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도요토미 가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그의 자손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처단됐습니다.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고 조선의 백성을 살육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지만, 그 가문은 멸문을 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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