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공주로 태어나 고려 왕후로 생을 마감한 노국대장공주
원나라 공주로 태어나 고려의 왕후로 죽은, 고려 개혁군주 공민왕과 세기의 로맨스를 만들었던 노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는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제1비로 원나라 출신의 마지막 왕후이며 국가 통치자의 이민족 최후의 왕후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보르지긴 부다시리. 흔히 한자어를 우리식대로 읽었을 때 보탑실리로 불립니다. 공민왕은 그녀의 이름을 고려식으로 왕가진이라 지어줍니다.
최종으로 결정된 공식 시호는 '인덕 공명 자예 선안 휘의 노국대장공주' 입니다. 보통 이 시호를 줄여서 노국공주 또는 노국대장공주라고 불립니다.
노국대장공주의 결혼 전 기록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어 언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알기가 어렵습니다.
위왕 베이르테무르(볼로테무르)의 딸로 여겨지며 원 왕실의 방계 공주 정도의 신분이었습니다.
공민왕은 1341년(충혜왕 복위 2) 12세의 나이로 원에서 숙위 생활을 하였고, 1349년(충정왕 1년)에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과 혼인하였고, 승의공주에 책봉되었습니다. 이후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로 돌아옵니다.
원의 공주에서 고려의 왕후가 된 그녀를 보고 대부분의 백성들과 대소신료들은 그녀 이전의 원나라 출신 왕후들과 같이 노국대장공주 역시 고려에 대한 애정 없이 원에 대한 생각으로 고려를 감시할 거라 예상합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노국대장공주는 기반이 미약한 공민왕의 정치운영을 지지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지켜준 공민왕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원나라의 공주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그녀였습니다.
원나라 내에서 세가 미약했어도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 신분이었기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부원배들이나 반공민왕 세력들은 서열상 자신들보다 높고 명분과 권위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전면에 나섰을 때 반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원 황실이 공민왕의 반원운동을 무려 한 달 뒤에 알게 된 이유도, 고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노국대장공주가 원나라에 알리지 않았던 덕분이었습니다.
1363년(공민왕 12)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 김용 등은 행궁인 흥왕사로 침입하여 원 황제의 명령을 받고 들어왔다고 하여
침전에 들어가 공민왕을 시해하고자 하였지만 노국대장공주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공민왕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녀가 공민왕이 있던 문 앞에서 버티며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공민왕은 무사히 탈출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는 비록 정략결혼에 의해 맺어졌지만,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부부의 금슬은 너무나 좋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국대장공주는 후사를 얻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국대장공주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대신들은 왕에게 후사를 잇기 위해 후궁을 들이는 것을 노국대장공주에게 건의합니다.
이에 그녀는 이를 허락했고, 이제현의 딸 혜비가 후궁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공주는 곧 이 문제를 허락해준 것을 후회했고, 음식을 먹지 않고 투기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정작 공민왕은 후사 문제로 인해 혜비 이씨를 들였음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는데, 이는 공민왕이 늘 노국대장공주만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이에 후궁을 더 들이라 신하들이 간청하지만 공민왕은 이를 거절했고, 노국대장공주가 승하하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여자는 들이지 않았습니다.
노국대장공주는 1364년 드디어 기다리던 임신을 하지만 다음 해 음력 2월 16일 공주는 난산 끝에 아이와 함께 사망하였습니다.
그녀의 사망으로 누구보다 슬퍼하고 충격이 컸던 공민왕.
노국대장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임금 공민왕은 공주 사후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요절로 인해 크게 상심한 공민왕은 그날 이후 정치에 뜻을 잃었고, 고려 왕조의 운명도 그날부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으니 이때 공민왕의 나이 겨우 36세였습니다.
고려말 개혁군주로 여러가지의 개혁을 시도하려던 공민왕에게 결정적인 좌절을 안겨주면서 고려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바로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이었습니다.
공민왕은 개혁에 대한 의지도 잃어버렸고, 정치까지 멀리하다 결국 자신의 시위군들에 의해 그 생을 마감합니다.
노국대장공주가 좀 더 오래 살았었다면, 개혁 군주 공민왕의 든든한 후원자로, 그의 부인으로 좀 더 있어줬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또 달라져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원의 공주로 태어나 고려의 왕후로 죽은 노국대장공주와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공민왕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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