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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세종에게 각각 귀양살이를 한 코끼리

 

동물원에가서 코끼리를 다들 한번씩은 보셨을 겁니다. 덩치는 크고 코는 길고, 귀도 큰 코끼리. 영상 등을 통해서도 자주 접하다보니 우리에게는 친숙한 동물인데요.

 

하지만 이런 코끼리를 조선시대 사람들이 봤다면 어떠했을까요?

 

 

큰 덩치와 요상하게 생긴 생김새로 인해 충격과 공포를 느꼇을 겁니다.

 

이런 코끼리가 약 600여년 전인 1411년 태종때 조선의 수도 한양에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동물을 본 적이 없었던 조선에서는 당연히 실록에 기록을 해뒀습니다.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자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씩을 소비하였다.

 

당시 일본 쇼군이 태종에게 선물로 코끼리를 바친 것입니다.

 

이 코끼리는 1408년 인도네시아 국왕이 일본 쇼군에게 선물한 것으로, 다시 3년뒤 일본이 조선에 선물로 보낸 것입니다.

 

태종

 

당시로서는 신기한 동물이었던 코끼리를 받은 태종은 말을 먹이고 기르는 사복시에서 코끼리를 키우게 합니다.

 

이때까지도 그들은 코끼리의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코끼리는 하루 18~20시간을 먹는데 투자하고, 300kg 정도를 먹어치우는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초식동일입니다. 당시 사람 먹을 양식도 넉넉하지 않았던 시기에 이런 코끼리의 먹성은 골칫거리였습니다. 실록에는 날마나 콩 네다섯 말을 소비했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조선의 골칫거리 코끼리가 큰 사고를 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전 공조 전서 이우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길들인 코끼리를 바치므로 3군부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1412 12월 당시 정3품으로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우라는 사람이 코끼리를 놀리다 성질이 난 코끼리에게 밟혀 죽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먹보 코끼리가 졸지에 살인마가 된 것입니다.

 

이 코끼리의 처우를 두고 1년 정도 고민하다 조정에서는 전라도 섬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코끼리를 전라도의 해도에 두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유정현이 진언하였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에 두소서."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하는것 없이 밥만 축내고, 쓸모도 없는 짐승이 사람까지 죽였으니...유배가 마땅하다고 병조판서가 직접 나서서 태종에게 간청하니 태종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말을 따라 귀양을 보내기로 합니다.

 

장도

 

그 유배지는 전라남도 끝자락에 있는 해도로 오늘날에는 노루를 닮았다해서 이름 붙여진 장도입니다. 장도는 전라남도 여수시에 속해있는 섬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을 거쳐 조선까지 왔던 코끼리가 이제는 섬으로 유배까지 가게되는데, 이 코끼리는 유배지에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길들인 코끼리를 육지로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방목하는데, 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불쌍히 여겼던 까닭에 육지에 내보내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였다.

 

 

섬으로 귀양살이를 간 코끼리는 먹을 만한 풀이 충분하지 않아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상태였고 점점 수척해졌으며, 얼마나 삶이 고단했는지 사람읋 볼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합니다.

 

사람도 귀양살이를 가면 고달픈데, 말 못하는 동물이 오죽했겠습니까...

 

결국 태종은 유배보낸지 6달 만에 코끼리를 불쌍히 여겨 다시 육지에서 기르라고 명 합니다.

 

이 코끼리는 이렇듯 태종실록에 1년에 한번씩은 등장하며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골칫덩이 코끼리는 태종을 거쳐 세종대왕에게 까지 가게됩니다.

 

 

1420년 겨울, 세종실록에도 이 코끼리가 등장하니 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라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코끼리란 것이 쓸 데에 유익 되는 점이 없거늘, 지금 도내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 가면서 먹여 기르라 하였으니,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경상도까지 아울러 명하여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기록은 세종실록에 남아있지만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고 되어있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태종 이방원에게 코끼리에 대해 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먹성이 좋아 백성들이 괴로우니 충청도와 경상도도 돌아가며 돌보며 고통을 분담하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또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충청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공주에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하였다. 선지하기를,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하였다.

 

 

9년전 고위 공무원을 죽인데 이어 이번에는 자신을 돌봐주던 노비를 밟아 죽인 코끼리. 밥만 많이 축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코끼리를 다시 섬으로 유배보내달라고 충청도 관찰사가 간청합니다.

 

세종

 

이에 세종은 코끼리를 다시 장도로 유배보내버립니다.

 

그러면서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코끼리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이 기록을 끝으로 이 코끼리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먼 타국에서 건너와 본의 아니게 살인까지 저질러 2번이나 섬으로 유배보내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코끼리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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