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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조선의 소드마스터, 북방의 수호신 이징옥

 

소드마스터, 한국사 최고의 맹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려의 척준경.

 

그런 척준경 만큼이나 한국사에서 무력만으로 놓고 보면 비견될 만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선의 이징옥입니다.

 

 

이징옥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세종 때 김종서를 도와 여진을 물리치고 북방의 6진을 개척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의 본관은 양산이며, 호는 원봉입니다. 중추원지사를 지낸 이전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가 있었으며, 3형제 모두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이징옥이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그와 관련된 야사들이 있는데요.

 

 

병든 어머니가 이징석과 이징옥을 불러 "내가 살아있는 멧돼지가 보고 싶다."라고 말하자 이징석은 그날 저녁 무렵 멧돼지 한 마리를 활을 쏘아 잡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징옥은 이틀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는데요. 사흘째 되는 날, 마침내 징옥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빈손이었습니다. 그를 본 어머니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형보다 힘이 더 세다고 하던데 왜 빈손으로 돌아왔니? 네 형은 벌써 사흘 전에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징옥은  그렇지 않습니다. 뒤뜰로 가보시지요.” 했는데요. 어머니가 뒤뜰로 나가자 큰 덩치의 멧돼지 한 마리가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이징옥은어머님의 말씀대로 살아 있는 멧돼지를 보여드리기 위해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활을 쏘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숨을 거두고 말 것이기 때문에 사흘 동안 멧돼지를 몰고 다니다가 오늘에서야 저놈이 지쳐 쓰러지길래 메고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호랑이를 10대 시절에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무용이 뛰어났습니다.

 

이징옥은 세종부터 문종, 단종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척박한 북방에서 근무했지만, 불평불만 한번 없이 충직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며, 청렴하기까지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겨울날 입을 옷이 한 벌밖에 없어 그의 부하 무관들이 문종에게 좋은 털 옷을 이징옥에게 하사해달라고 상소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용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성품도 훌륭했고, 형제간 우애도 좋았습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장지 문제로 형 이징석과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화가난 이징석이 이징옥을 아버지 빈소에서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북방 여진족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용장 중의 용장인 이징옥이었지만 나이 많은 형이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해도 형에게 대항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실려 나갈 정도가 될 때까지 맞았다고 하니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징옥은 왕을 호위하는 시위군인 갑사가 되어 부사직을 지냈으며, 1416(태종 16) 무과 친시에 제1등으로 급제하여 사복소윤이 됩니다.

 

1423(세종 5) 경원 첨절제사로 임명된 뒤 이징옥은 세종 시대부터 북방에서 근무하며 여진족을 상대로 용맹을 떨쳤는데요.

 

여진족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명사였습니다.

 

 

북방을 평정할 때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김종서에게 충성하였으며, 이때 김종서는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징옥은 직접 전장에 나아가 여진족을 무력으로 제압해 몰아냈습니다.

 

 

김종서와 이징옥으로 인해 함경도에 6진이 완성되었으며, 두만강 이남은 완전히 조선의 영토로 자리 잡게 됩니다.

 

1434(세종 16) 판회령도호부사가 된 이징옥은 이듬해에는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어 조선의 북방을 지키는 역할을 계속 이어나갑니다.

 

1453(단종 1)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도 명을 내려 이징옥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계속해서 유임시킬 만큼 당시 북방의 방어에서 이징옥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방의 수호신이었던 조선 최고의 장수 이징옥. 그런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니. 단종 1년에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에 의해 계유정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살해당하고, 그 측근들이 숙청당했습니다.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에게 김종서의 충직한 부하였던, 북방을 지키는 무력이 뛰어난 이징옥은 제거 대상 1순위 였습니다. 이징옥을 살려두고는 두 발 뻗고 잘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수양대군은 함길도에 주둔하고 있는 이징옥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서 파면하고, 새로운 함길도 도절제사에 박호문을 임명하고 이징옥을 불러들입니다.

 

이징옥은 후임 함경도 도절제사로 온 박호문에게 직위를 인계하고 한양으로 오던 중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이 죽고 조정에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죽이고, 그의 아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가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 라 칭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니 이 사건이 바로 조선 왕조 최초의 대규모 반란인 이징옥의 난입니다.

 

《단종실록》에 그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금나라를 계승한 대금의 황제임을 자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징옥은 도읍을 오국성으로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에게 후원을 요청하였는데요.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진족에게 이징옥은 공포의 대상이었지,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호응해주는 여진족이 없어 그의 쿠데타 세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토벌군이 출정하기도 전에 종성에 주둔하던 이징옥은 부하 장수인 이행검과 정종에 의해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습니다.

 

이징옥의 시신은 거열로 찢겨졌으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졌습니다.

 

 

여진족이 벌벌 떨며 두려워하던 조선의 소드마스터 이징옥은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이징옥은 처음부터 반란을 할 생각이 없었고, 평생을 북방 개척에 힘을 쏟았던 충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징옥도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다 보니,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 것이며, 스스로 대금황제를 칭했다는 것은 수양대군 입장에서 그를 역모의 수괴로 만들기 위한 승자의 기록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조선 후기의 명재상인 채제공도 '번암집'에서 이징옥은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한 것이지 단종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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