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로 죽음까지 받아들인 고려말 명장 정세운 장군
고려말 홍건적을 물리치며 고려를 지켜낸 큰 공을 세웠지만 간신의 모략에 의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인물은 고려말의 명장 정세운 장군입니다.
마지막 순간 왕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고는 충의 하나만으로 죽음까지 받아들인 인물이 정세운 장군입니다.
정세운 장군은 공민왕이 세자 때 함께 원나라에 들어가 호위하였고, 왕으로 즉위하자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김용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1359년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비롯하여 부원배들이 공민왕을 무시하고, 권력을 농단하자 공민왕의 명을 받아 기철과 그의 일당들을 주살하여 다시 한번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1359년 음력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이 얼어붙자, 강을 건너 의주, 정주, 인주, 철주의 4주를 함락시키고 서경을 점령했습니다.
1360년 음력 1월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했고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습니다.
고려군은 다시 홍건적을 추격하여 공격했고, 이에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 적은 3백여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361년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반성, 사류, 관선생, 주원수, 파두반 등이 주도적 역할을 하며 2차로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했고, 그 군세는 약 2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때 정세운 장군은 서북면군용체찰사에 임명되어 절령의 성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홍건적에 의해 음력 11월 11일에 절령 방어선을 돌파당하고 맙니다.
이에 공민왕 및 고려 조정은 남쪽의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로 파천하게 되었으며, 이때 정세운 장군이 호종을 합니다.
왕가가 이천에 도착하던 날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켰습니다.
정세운 장군은 본디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한 인물이었는데요. 그는 밤낮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홍건적을 소탕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정세운 장군은 공민왕에게 적을 섬멸할 수 있게 해 달라 주청을 했고, 이에 공민왕은 그를 총병관으로 임명하며 절월을 주어 모든 군사를 총독하게 했습니다.
이때 홍건적은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개경을 본거지로 삼아 각지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정세운 장군은 1362년 정월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구수, 최영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군사 20여만 명을 거느리고 출진하였습니다.
이후 개경을 포위하고 홍건적에게 맹공을 가했고, 이로 인해 전의가 꺾인 홍건적은 개경에서 도망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후퇴했습니다.
고려군은 퇴로를 열어준 채 홍건적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그해 여름에는 수장 중 한 명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때 이성계 장군도 활약을 하는데, 그는 친병 2000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작전에 참가했고, 선봉에서 적장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여, 홍건적 수괴 사유와 관선생을 죽이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고려는 막대한 타격을 받아 국운이 쇠퇴하게 됩니다.
음력 11월 24일 공민왕과 고려 조정은 개경에 재 입성하게 됩니다.
정세운 장군은 홍건적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고, 고려 종묘사직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이때 한국사 최고의 간신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김용이 흉계를 꾸미는데요. 그는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정세운 장군과 같이 왕을 모신 인물로 총애를 받던 신하였습니다.
정세운이 큰 공을 세우자 김용은 공민왕의 문서를 위조하여 정세운의 부관 격으로 군을 이끌고 있던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에게 정세운을 역모의 죄를 물어 참살하라 명을 내립니다.
그들은 공민왕이 내린 명으로 알고 정세운 장군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최후의 순간 정세운 장군은 왕의 명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충의로 죽음까지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후 김용은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에게는 상관을 죽였다는 이유를 물어 이들을 죽여버립니다.
정세운을 비롯한 이들은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낸 명장들이었지만 간신 김용에 의해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김용은 이 사실이 들킬까 두려워 기황후와 내통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세울 것을 계획한 후 공민왕이 흥왕사에 머무르는 것을 기회로 난을 일으켜 문하시중 홍언박을 비롯한 수많은 관리를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과 닮은 얼굴이었던 환관 안도치가 왕을 대신하여 죽으면서 왕을 암살하려던 음모는 실패하고 맙니다.
이 사건이 바로 흥왕사의 변 (난) 입니다.
그런데 김용은 자신이 난을 일으키고도, 오히려 난을 자기가 직접 진압하고 공을 세운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은 이 난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김용이 흥왕사의 변과 관련된 이들을 체포한 후 국문하지 않자, 점점 의심을 받게 되었고 결국 임견미 등이 반란군을 국문하면서 진상이 밝혀지게 됩니다.
김용은 이 와중에도 "나는 시중 홍언박 등을 제거하려고 했을 뿐 역심은 없었다."라고 변명했으나 임견미가 "그렇다면 안도치는 왜 죽였냐?"라고 반문하자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충신들을 음모로 죽이고 공민왕까지 시해하려 했던 희대의 간신 김용은 역모죄로 극형에 처해져 사지를 찢기는 형을 받고 최후를 맞이합니다.
왕의 명령이라는 말에 자신의 목숨조차 기꺼이 바친 우직한 충신 정세운 장군.
이후 홍건적을 피해 복주로 피난했을 때 호종한 공과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도형벽상공신 1등에 책록됩니다.
역사를 보면 충신들의 최후가 비참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몽전쟁 당시 12인의 결사대로 몽골군의 공격했던 김경손 장군도 그러했습니다.
👉👉세계 최강 몽골군에 13명의 미니 기병대로 돌격을 감행한 고려의 장군
충신들을 시기하는 간신배들은 어디든 존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역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반복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죠.
고려말 나라와 백성을 위해 홍건적을 물리치고도 충의로 죽음까지 받아들였던 정세운 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한번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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