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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

 

태조 왕건의 치트키로 고려 최강의 맹장이었던 유금필 장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인 유금필.

 

후대의 강감찬, 척준경, 김윤후,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초기, 중기, 후기를 대표하는 장군으로 왕건에게 굉장한 신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유금필

 

유금필의 생년은 알 수 없으며 황해도 평산군 출신으로, 궁예가 세운 태봉국에서 마군 장군이었다가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겼습니다.

 

고려 건국 당시에는 마군 장군 홍유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920년 골암진에 쳐들어온 북적들을 제압하면서부터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발해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발해 남부지역에 거주하던 북방 야인들이 고려의 변경을 침략했습니다. 이들을 제압하는 일을 맡게 된 유금필은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골암에 도착합니다. 이후 유금필은 이들의 추장 300여명을 불러 모아 술과 음식을 차려 성대하게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추장들을 모조리 잡고서 위협을 하여 복종시켰는데요. 또 사람들을 여러 부락에 보내,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라고 하자, 여러 부락에서 귀순한 자가 1,500, 또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3천여 명이 되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금필은 고려에 투항해오는 북쪽의 부락민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병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습니다.

 

 

골암진 문제를 해결한 유금필은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하는데요.

 

925년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지금의 논산시인 연산진을 공격해 후백제 장군 길환을 죽이고, 이어 지금의 예산군인 임존군으로 진격해 적병 3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조물성에서 위기에 처한 왕건을 돕기 위해 군을 이끌고 갔습니다.

 

견훤

 

상황이 유리했던 후백제의 견훤이 유금필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화친을 요청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유금필의 장수로서의 남다른 포스를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928년 지금의 온양군인 탕정군에서 성을 쌓고 주둔하고 있던 유금필은 후백제가 3천명을 동원해 청주를 공격하자, 즉시 군사를 이끌고 청주로 가서 적군을 격파하고 300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승리를 거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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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자신이 새운 나라를 자신이 무너뜨린 왕. 지렁이의 아들인가 지

후삼국 시대의 문을 열고., 스스로가 그 문을 닫았던 군주가 있었으니 그는 후백제의 창업 군주인 견훤입니다. 통일신라 말기 혼란한 상황 속에서 후백제를 세웠던 견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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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년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가를 만한 전투인 고창전투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무기가 흉악한 도구이며 전쟁이 위험한 것은 자명한 것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겨우 승리할 판인데 어찌 적을 앞에 두고도 지는 것을 겁내는 겁니까?" 라 말하며 유금필이 나서서 먼저 공격할 것을 건의하며 적진으로 돌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후백제는 무려 8천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나왔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투 이후 왕건은 고창 전투의 승리를 유금필의 공이라고 말하며 기뻐했습니다.

 

고창전투의 승리로 유금필은 고려가 후삼국의 패권을 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유금필은 거듭된 전투에서 승리를 올리며 기세를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그를 견제하고자 하는 세력이 모함을 하여 931년 지금의 백령도인 곡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유금필은 곡도에 귀양을 가있는 와중에도 태조와 나라를 걱정하며 상소를 올리는 등 충의를 꺾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932년에 후백제의 수군 장군인 상귀와 상애가 지휘하는 특별함대가 고려의 후방인 대우도를 침략했습니다. 유금필은 유배지에서 함선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대우도에서 개경을 넘보려던 상애를 몰아내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왕건은 그를 귀양 보낸 결정을 후회하고, 유금필의 충성심을 인정해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933 5월 백제군 사령관 신검이 다시 신라 국경을 침공해 서라벌이 6년만에 다시 후백제 손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왕건은 다급히 유금필에게 구원 명령을 내렸고,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은 군사들을 모을 시간도 없어 겨우 80명의 부하들과 함께 신라를 구원하러 갔었습니다.

 

출발하기 전 유금필은 부하들에게 적을 만나면 숫자가 적어 죽을 수도 있으니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하들은 그와 함께 죽기로 맹세를 하였고 사기 백배하여 서라벌로 떠납니다.

 

 

가는 길에 후백제의 신검군과 만났지만 겨우 80기 만으로 신검의 대군을 뚫어버리고 서라벌에 입성합니다.

 

유금필은 서라벌을 안정시키고 7일간 환대를 받은 다음 돌아오는 길에 다시 신검의 대군과 맞붙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유금필은 적장 환궁과 금달을 사로잡아버리며 후백제군을 박살 내 버립니다. 겨우 80기로 말이죠.

 

여기까지만 봐도 유금필은 왕건의 치트키이자 히든카드였다고 할 수 있는 장수였습니다.

 

 

그는 이후 운주전투에서 고창전투에 버금가는 큰 공을 세웁니다.

 

934 1월 태조 왕건이 지금의 충남 홍성군인 운주를 정벌하고자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하자, 후백제 견훤이 소식을 듣고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왕건에게 화친을 하며 각자의 영토를 지키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태조가 장군들과 함께 이 문제를 의논하자, 유금필은 지금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수천의 강한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군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후백제군이 아직 대오를 정비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유금필의 기습 작전은 성공하였고 적군 3천여 명을 베고, 여러 장수들을 포로로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운주 전투의 승리로 인해 지금의 공주인 웅진 이북 30여 성이 자진해서 고려에 항복해왔습니다.

 

유금필의 활약은 육상에서 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이루어졌는데요.

 

후백제가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내부 분란이 일어난 시점이었습니다.

 

왕건은 나주지역을 재 탈환하려 하였고, 이에 적임자를 유금필이라 생각했습니다.

 

 

935 4월 도통대장군에 임명된 유금필은 3일간 왕건의 환송을 받으며 나주로 출진하였고, 곧바로 나주를 탈환하는 괴력을 선보였습니다. 이때 유금필이 타고 간 함선은 왕의 함선으로 태조가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왕건이 예성강까지 나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그를 맞이할 정도로, 나주 정벌의 의미가 고려에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려가 나주 일대를 탈환하자, 그 해 6월 아들 신검에게 배반당하여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로 귀순할 수 있었습니다.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자, 신라 경순왕이 그해 10월 고려에 투항 의사를 밝혀왔고, 11월에 나라를 들어 고려에 투항했습니다.

 

936 2월에는 견훤의 사위로 순천 지역을 장악한 박영규가 고려에 투항을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후백제의 영토는 크게 줄고, 고려의 우세는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결국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대군을 동원한 총공격을 준비했습니다.

 

 

936 9월 왕건이 총지휘하여 고려군 87,500명이 지금의 구미시인 일선군으로 진격하자, 후백제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막음으로써 일리천에서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도 유금필은 북방의 여러 부족 출신 기병 9,500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고려군은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 장군과 포로 3,200명을 잡고, 5,700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립니다.

 

고려군은 계속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그 해 9월 지금의 충남 논산인 황산군에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어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에 입성함으로써, 고려는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이룹니다.

 

 

유금필은 고창, 운주, 나주전투 등에서 거듭 승리를 거둬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랬기에 부하들은 그와 함께 죽기로 맹세를 하였는데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의 군대는 사기가 충전한 정예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결단력과 용감함, 그리고 부하들에게 신뢰를 받는 자질을 갖춘 그는 이종족을 포용하고 활용할 줄 아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골암진에서 여러 부족장들을 제압할 때 보여준 것처럼 단순 무식하게 용맹만 있는 것이 아닌 지혜마저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유금필은 개인적인 일보다는 나라의 일을 앞세운 충성심 강한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왕건은 다른 장수들보다 그를 더 크게 신뢰했습니다.

 

유금필은 ‘태사삼중대광’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고, 그의 딸은 왕건의 9번째 부인인 동양원부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941년 주군인 왕건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시호는 충절로 지어졌습니다. 유금필이 사망하자 왕건은 몹시 슬퍼했다고 합니다.

 

또한 태조 왕건은 죽기 전에 따로 유언을 남겨서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왕건이 얼마나 유금필이라는 장수를 믿고 의지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그 유언 덕에  고려 문종 때 유금필의 후손인 유공의가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죄를 묻지 않고 숙주방어사에 제수되었으며, 또 다른 자손인 유중경은 어머니가 간통으로 낳은 소생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유금필의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벼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후손들은 조상 잘 둔 덕을 톡톡히 본 것입니다.

 

 

사료가 빈약한 편인 후삼국 시대에도 그 어떤 사료를 뒤져봐도 유금필의 패전 기록은 한 줄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세가 밀리는 상황이어도 유금필만 등장하면 역전되었습니다.

 

한국사 전체를 뒤져봐도 개인의 용맹함과 무용으로 전세를 뒤집은 장수는 기껏해야 척준경, 이성계 정도뿐입니다.

 

용장, 지장, 덕장의 모든 면모를 갖춘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완벽한 무장이 유금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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