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나대용

 

거북선을 개발하고, 쾌속선을 고안하여 건조한 나대용

 

이순신 장군 하면 거북선이 함께 떠오릅니다.

 

임진왜란 활약한 거북선을 개발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전란 이후에는 필요 인원을 줄여 적은 인원으로도 전선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량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나대용입니다.

 

나대용

 

나대용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시망, 호는 체암입니다.

 

1556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향교의 교생으로 있다가 1583년 훈련원 별시 무과에서 병과 29위로 급제하게 됩니다.

 

이후 훈련원 봉사를 지내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1년 전라좌수영의 군관이 되어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을 지냈습니다.

 

 

이 시기에 나대용은  전선 제작을 감독하는 군관으로 있으면서 거북선을 개발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전란 이후 창선, 해추선 같은 전선을 개량 및 개발한 것을 근거로 나대용이 전선을 개발 및 제작하는 쪽으로 재능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5 28(음력 4 18) 좌수영의 5개 진포중 하나인 발포의 임시 지휘관으로 임명이 되었으며 옥포해전 , 사천해전에서는 보조병력인 유군을 이끄는 유군장으로 활약합니다.

 

 

옥포해전에서는 적의 대선 2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사천해전에서는 분전 끝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한산도 대첩에서도 재차 부상을 당합니다.

 

이후 나대용은 난중일기에 1594 4 3(음력 2 13) 이순신의 말을 전하러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갔다는 내용까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1594년 나대용은 강진현감으로 임명되었으며 금구현령을 거쳐 1599년 능성현령을 지냈습니다.

 

 

같은 해에 전라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전선 25척의 건조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당시 조선 수군운 배에 태워 노를 젓게 할 격군을 확보하지 못해 전선의 수를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판옥선에는 125명의 격군이 필요했는데, 나대용은 이런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42명의 격군만으로도 운항이 가능한 창선을 개발합니다.

 

1606년에는 삼도통제사 이운룡을 통해 조정에 창선의 건조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를 조정은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시험 운용할 창선을 건조하는 책임자인 조선차관으로 임명이 됩니다.

 

광해군 즉위 후에는 쾌속선인 해추선을 개발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공으로 1611년 당상관으로 제수됩니다.

 

당시 사헌부는 이들에게 당상관의 직위가 주어지는 것에 집요하게 반대했지만 광해군이 끝까지 밀어붙였던 것입니다.

 

이후 1611년에는 경기 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에 제수되었지만 사천 해전에서 맞았던 탄환의 독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1612 1 29 57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나대용은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조선기술자로 평가되며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장보고급 잠수함 중 1척의 함명을 나대용이라 명명하였고, 나대용함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정운 장군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남 영암에서 훈련참군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난 정운. 1570년(선조 3년)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20위로 급제하니 그의 나

blogdaitso.com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의 영웅 - 적에게 화약고가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의 영웅 남이흥 장군 정묘호란 후금군에게 밀려 죽기 직전 적에게 화약고가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남이흥 장군

blogdaitso.com

 

반응형
교차형 무한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