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정운 장군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남 영암에서 훈련참군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난 정운.
1570년(선조 3년)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20위로 급제하니 그의 나이 28세였습니다.
무과 급제 후 훈련원 봉사, 금갑도 수군권관, 웅천 현감 등을 지냅니다.
그러나 정운 장군은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그로인해 상관들의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제주판관을 지낼때 제주목사와 불화가 있어 파직되었습니다.
그러다 1591년 녹도만호가 됩니다.
정운 장군은 충무공 이신신 장군이 전라좌수사 부임한 이후 가장 신뢰한 장수였으며, 의지했던 참모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휘하 부대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순시를 나섰습니다.
그 결과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곳이 많아 몇몇 장수들에게는 그 책임을 묻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정운 장군이 있는 녹도진을 가장 먼저 순시했는데, 난중일기에까지 그의 칭찬을 할 만큼 전쟁 준비 상태가 완벽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운 장군이었기에 자신보다 직책은 낮았지만 나이도 2살이나 많고, 임관은 6년이나 빠른 정운 장군을 이순신 장군은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첫 해전인 옥포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조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를 기다리며 출전을 망설이자 단독 면단을 요청한 정운 장군.
그는 이순신 장군에게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며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진언을하였고, 이에 이순신 장군은 곧장 출전을 결심합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 첫 출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옥포 해전에서 정운은 함대 맨 뒤에 후부장으로 배치되는데요.
그런데 다른 전투선이 감히 왜군을 공격하지 못하자 정운이 군사들을 독려해 선봉장으로 나서 2척의 왜선을 침몰시키는 전공을 세웁니다.
이후 다른 전투에서도 선봉장이 되어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립니다.
한산도 대첩에서는 적의 대선 2척을 격침시키고 3명의 목을 베고 2명의 포로까지 구출해내는등의 큰 전공을 세웁니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정운 장군은 조선 수군의 핵심 장수가 됩니다.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대조총에 맞아 몸을 관통당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7년 4월 17일 을축조에 “이순신 진중의 정운이라는 사람이 그 대포를 맞고 죽었는데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도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선장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운 장군을 잃고 이순신 장군은 크게 비통해했다고 합니다.
또한 직접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했습니다.
사령관이 휘하 장수의 사당 제향 건의하거나 직접 제문을 쓰는 것도 당시 시대상 매우 드문 일로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정운 장군을 아끼고 의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정운 장군은 사후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1605년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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