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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성에서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송상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다음날인 1593년 음력 4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을 공격합니다.

 

이때 병력의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송상현 입니다.

 

송상현

 

송상현은 1551년 사헌부 감찰 송복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5세에 승보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으며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76(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성판관을 지냈습니다.

 

 

이후 1584년 부터 종계변무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를 두번이나 다녀옵니다.

 

1591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는데요.

 

이당시 왜침이 있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동래부사 송상현은 그에 대비를 하며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1593년 음력 4 14일에 일본군 제1선발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대가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다다랐습니다.

 

제승방략에 규정된 대로 양산 군수와 울산 군수가 이끄는 병력이 도착했고 경상 좌수사 박홍과 경상 좌병사 이각이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으나 그 병력에 적었던 탓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중 이각은 동래성을 구원한다는 핑계로 산에 진을 치겠다며 도망쳐버립니다.

 

일본군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에 도착해 전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송상현에게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라고 했는데요.

 

 

이를 본 동래부사 송상현은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라며, 길을 빌려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며 끝까지 항전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동래부순절도

 

이에 적군은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15일에 전투가 전개됩니다.

 

송상현은 군사를 이끌고 용감하게 항전하여 반나절이 넘게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송상현은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후 조복으로 갈아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절을 네 번한 후 항전을 이어가다 결국 전사합니다.

 

적장이지만 그의 충성심과 용기에 감동한 고니시는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 했습니다.

 

송상현은 사후 이조 판서, 찬성에 추증되었고, 동래 안락서원과 충렬사에 제향되었습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어려움 속에서도 일본군에 맞서 싸운 송상현.

 

동래의 후신인 부산광역시에서는 부산진의 정발, 다대포의 윤흥신과 더불어 부산을 지킨 위인으로 송상현을 기리고 있습니다.

 

부산의 양정에는 송상현의 동상이 있으며, 그 동상이 있는 삼거리를 송공 삼거리라 부르고 있는데요.

 

이 송공이 바로 송상현으로 부산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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