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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가 처단했던 일본의 전범들

 

도시락 폭탄 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국군 100만도 하지 못한 일을 혼자 해낸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가 처단했던 일본 전범들은 누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이날은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경축과 상하이 사변 승전 기념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침략의 원흉인 일본 전범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큰 행사였습니다.

 

오전 7시 45분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에 도착합니다. 그의 어깨에는 수통이 메어 있었고, 양손에는 도시락과 일장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윤 의사도 행사장에 입장 후 자리를 잡았습니다.

 

훙커우 공원에는 일본군 1만 명을 포함해 3만여 명의 일본인들이 모여 식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오전 9시. 삼엄한 경비 속에 내외빈이 줄줄이 입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거물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었으며, 이를 필두로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제9사단 장인 우에다 겐키치 중장, 상하이 총영사인 무라이 쿠라마쓰, 일본공사인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거류민 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지, 거류민단 서기장인 도모노 모리 등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공식 행사와 열병식이 2시간 30분 동안 진행이 되었고, 오전 11시 40분 모든 참석자들이 선 채 해군 군악대 주악에 맞춰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윤봉길 의사는 일어나 사령대 쪽으로 수통 모양의 폭탄을 던졌습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시라카와와 우에다가 ‘폭탄이다’라 외치며 10여 발자국 물러섰으나 잠시 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습니다.

 

거사 결과

이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츠의 면전에서 폭발하였고, 이로 인해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폭발로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중상을 입고 다음날 새벽 사망.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온몸에 64곳이나 파편이 박힌 채 혼수상태로 이송. 그 후 일주일 만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는 훗날 일본의 외무대신이 됐는데요. 1945년 9월 2일 미국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러 등장할 때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무게 10kg의 의족에 의존했는데, 이 상처를 준 것이 윤봉길 의사의 폭탄 파편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폭발 직후 눈을 다친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결국 실명, 제9사단장인 우에다 중장은 발가락 4개가 완전히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고, 상하이 총영사인 무라이와 거류민단 서기장인 도모노는 경상을 입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전범들 중 가장 거물급이었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그는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을 상징하는 핵심 인물입니다. 1925년 대장으로 승진한 이후 육사 교장,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  육군성 차관, 관동군 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 대신을 지낸 일본 육군의 대표적인 지휘관이었으며, 1928년 퇴직했지만 1932년 1월 29일 상하이 사변을 발발하자 다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복직했었습니다.

 

시라카와는 30여 군데가 넘는 파편을 맞았지만 비교적 상태가 좋았으나 패혈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일왕이 남작의 작위와 욱일 훈장까지 내리고, 사주(임금의 내리는 술)까지 하사했지만 결국 사망합니다.

 

상하이 침공의 원흉인 시라카와가 사망하자 중국인들은 환호를 했는데요. 이 모든 일은 윤봉길 의사 혼자 이루어낸 쾌거였습니다. 30만 중국군이 막아내지 못한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을 윤봉길 의사 홀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승전 축하식장을 한순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한 후 헌병대로 끌려갔습니다.

 

거사 이후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중국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중국 국민들까지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 내에 있었던 반한 감정이 말끔히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장제스 국민당 주석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두고 이렇게 격찬했습니다.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

 

또한 이 거사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또한 장제스는 한반도의 독립을 지지하고,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조선의 독립을 적극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 자체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윤봉길 의사의 이번 의거가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 독립을 이끌어낸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그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교외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장엄하게 순국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1946년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수습이 되어 국민장을 치른 뒤 현재 효창원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윤봉길 의사에게 대한민국장을 추서 했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전범들을 처단했던 윤봉길 의사.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사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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