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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600억 전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한 이석영 선생

 

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같은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 말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영석 이석영 선생으로 삼한갑족 명문가의 자재에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석영 선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석영 선생은 이유승의 아들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그는 당숙 뻘 되는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이석영 선생의 집안은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의 집안이었습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 이들의 10대조이며, 영조 때 영의정이었던 이광좌, 이종성 등 정승 여섯과 대제학 둘이 이 집안에서 나왔습니다.

 

 

이석영 선생의 양부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막대한 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원은 서울 3대 부자, 경기도 5대 부자, 조선의 10대 부자로 꼽히던 재력가였습니다. 이런 양부 이유원에게서 이석영 선생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다른 형제들도 돈이 많았지만, 6형제 중 재력은 이석영 선생이 으뜸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재산은 만석이 넘었다고 하며, '양주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남의 땅을 밟지 않아도 될 만큼'의 광대한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0년 어느 가을날 이석영 선생의 6형제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석영 선생의 형 건영을 비롯해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등 네 아우였습니다. 넷째 우당 이회영이 이 자리에서 왜적의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생명을 도모하지 말고, 모든 형제들이 가족을 대리고 서간도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자고 말합니다.

 

이에 형제들은 생각해 볼 것 없이 이회영의 의견에 찬동했고, 망명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이석영 선생의 나이 쉰여섯 살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습니다.

 

 

이석영과 그의 형제들은 서둘러 재산을 정리했고, 그러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하고 처분했다.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재산을 처분하면 일제의 감시망에 걸릴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6형제는 명동과 을지로에 있던 토지는 매각을 포기하고 맙니다. 현재 시가로 따지면1조 원에 가까운 금싸라기 땅을 포기한 것이다. 이석영 선생이 마련한 자금은40만 원 정도였습니다. 당시 쌀 1석이 3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오늘날 가치로는600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석영 선생과 형제들은 1910 12월 서간도(남만주)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만석의 재산에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는데, 스스로 그 삶을 버리고 고단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 선생입니다.

 

이들 형제들은 남만주 유하현 횡도촌과 삼원보 추가가에 터를 잡고, 한인 자치 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했습니다. 이 자금은 이석영 선생에게서 나왔습니다.

 

 

이후 조국의 광복을 위한 중견 간부 양성을 위해 신흥 강습소를 열었는데, 이것이 신흥 무관 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자금 또한 이석영 선생에게서 나왔습니다.

 

 

1920 8월 신흥 무관학교가 폐교가 될 때까지 10년 동안 35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고, 이들은 청산리 대첩 등에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석영 선생은 이런 신흥 무관학교에 전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40만 원이라는 엄청난 재산이 불과 서너 해 만에 30만 원 정도가 빠져나가버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그가 있던 서간도에 가뭄과 서리 등의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까지 망치면서 이석영 선생은 이주한 지 얼마 못가 곤궁한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 1920년 경신참변이 일어나 일본군이 만주 일대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이 대학살을 피해 이석영 선생은 10여 년 머물렀던 서간도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이석영 선생은 중국을 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고, 가진돈이 없어 비지를 얻어 겨우 끼니를 때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굶주림으로 인해 이석영 선생은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변 도움으로 겨우 장례는 치렀지만 퇴락한 중국인 공동묘지에 버려지듯 묻히고 말았습니다.

 

한때 만석 재산가이자 삼한갑족이라 일컬어지는 명문가의 후손이었던 이석영 선생.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비참하였습니다.

 

 

한말 이석영 선생만큼이나 부자였고, 명문가였던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해 송병준 같은 이들도 거부였지만, 매국과 친일을 하며 일신상의 안위와 부귀만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석영 선생은 이들과는 반대되는 길을 걸어갔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이석영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인물인 것입니다.

 

 

이런 이석영 선생이 광복 후 무려 46년이 지나서야 나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91년에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습니다.

 

편안한 길을 두고, 고난과 역경의 길인 것을 뻔히 알고도 그 길을 선택한 이석영 선생. 우리는 그의 이름 석자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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