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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 그는 공포정치를 통해 절대왕권을 꿈꾸었던 인물입니다. 그에게 바른 말을 하거나 그의 눈밖에 나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요.

 

이런 연산군의 광기를 제어하고, 어린아이 다루듯 한 여인이 있었느니 그녀는 바로 장녹수 입니다.

 

장녹수

 

연산군 주변에 수많은 여인이 있었지만,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외모도 예쁘지 않았던 장녹수를 연산군은 총애하였습니다.

 

몸은 통통한듯이 풍만하며얼굴도 그다지 예쁘지 않았으며나이 또한 연산군보다 무려 4살이나 많았던 장녹수는 어떻게 연산군의 여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장녹수는 양반인 아버지와 노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국법에 의해 어머니의 신분을 물려받아 천민이 되어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김수말의 노비로 살다가 제안대군의 가노와 혼인을 하며 제안대군의 노비가 되고 아들을 낳게되는데요.

 

장녹수는 노비의 삶을 살기보단 기생으로서의 삶을 선택. 노래와 춤을 배워 남편과 아들을 버려두고는 기생으로 살게 됩니다.

 

 

장녹수는, 나이에 비해 엄청 동안이었으며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불렀다고 합니다. 특히 노래에 재능이 있었는데,  그녀의 노래솜씨는 궐에까지 전해져 연산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장녹수의 노래가 궁금해진 연산군이 그녀를 궐로 불러들입니다.

 

궐에 들어온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된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숙원의 첩지를 내리고는 궐에 들어 앉힙니다.

 

연산군

 

잠시 연산군의 외모에 대해 얘기를 해보면 그는 허리는 호리호리하고, 얼굴은 예쁘장한 꽃미남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연산은 노년의 훈구파 대신 뿐만아니라, 중장년의 사림파 신하들도, 어리고 경험이 없는 왕을, 우습게 보고, 업신여긴다 생각했습니다. 연산군이 정치적인 문제로 신하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았고 장녹수는 이런 연산군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줬다.

 

 

장녹수는, 누나가 남동생을 다루듯이, 그녀의 주특기인 "노래" "" 그리고 "애교"로써, 예술적 기질이 뛰어난 연산군의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었습니다.

 

 

연산군이 어릴 적에, 모후인 폐비 윤씨가 사사되어, 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애정결핍으로 인한 공허감을 자주 느꼇는데요.

 

 

장녹수가 연산군과 함께 엄마와 아기의 역할놀이를 하며 이를 해소했다고 합니다. 장녹수가 "엄마"가 되고, 연산군이 "아기"가 되는 놀이가 그것입니다. 장녹수는 무엄하게도, 명색이 한 나라의 왕인 연산군의 "어릴 적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도 하고 아주 심할 때는, 장녹수가, 왕인 연산군에게, 잘못을 한 아기를 엄마가 꾸짖듯이,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공포정치를 통해 절대왕권을 구축한 연산군을 아기다루듯이 하여 모정과 색다른 취향을 보여주며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에게 있어서, 무조건 인정해주고, 모든 투정을 받아주는 헌신적인 엄마와 같은 여자였습니다.

 

 

뛰어난 예술적 기질 갖고있고, 연산군의 애정결핍을 해결해주었던 장녹수. 이점이 그녀가 연산군을 유혹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렇게 부부 금슬이 좋은, 연산군과 장녹수. 결국 둘 사이에 딸까지 낳게 됩니다.

 

연산군의 총애를 배경으로 장녹수는 국사와 재정을 어지럽게 하면서 연산군의 실정을 부추겼습니다. 자신의 형부에게는 벼슬을 내려주었고, 장녹수의 오빠와 자녀들을 양인 신분으로 면천시켜주었습니다.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에 왕이 혹해서 상으로 주는 돈이 거만이었다. 부고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냈고,  금은주옥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 전답, 가옥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했다. 상 주고 벌 주는 일이 모두 그녀의 입에 달렸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장녹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 소혜왕후까지 나서서 이를 나무랐지만, 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녹수의 파행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궁 밖에 있는 사가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렸고, 장녹수의 치마를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한 기생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녹수의 위세를 믿고 그 집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고너도 나도 출세를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요. 연산군의 폭정을 부채질을 한 장녹수는 중종반정을 계기로 한순간에 처지가 뒤바뀌고 맙니다. 중종반정을 통해 연산군은 폐위를 당하였으며 장녹수는 도망을 치던 중 반군들에게 잡혀 참형을 당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끝이 나고 마는데요. 연산군이 장녹수를 그토록 총애했던 것은 서로 예술적인 교감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자유롭고 낭만적인 성품으로 풍류를 즐겼던 연산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늘 생모를 그리워한 연산군의 공허한 마음을 연상의 장녹수가 엄마처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연산군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었던 장녹수가 연산군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면 그녀가 그런 현명한 여인이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짧았지만 화려했던 그녀의 삶, 마지막은 너무나 비참했던 그녀의 삶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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