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선조로부터 이순신 장군을 살려낸 정탁
임진년에 이어 1597년 정유재란이 다시 일어났고, 이때 전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한산도에서 항양으로 압송이 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조선의 임금 선조는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명을 어긴것에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큰 일이 일어날 상황이었는데요.
이때 선조로부터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과 함께 무명에 가까운 명장들을 발탁해 조선이 승리할 수 있게 노력한 정탁 이었습니다.
정탁이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목숨은 어떻게 됐을지 모르며, 임진왜란의 결과 또한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류성룡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류성룡 만큼이나 조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정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탁의 본관은 청주이며 예천출신으로 이황과 조식에게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1552년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경사는 물론 천문,지리,상수,병가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이순신과 곽재우,김덕령 등의 명장들을 류성룡과 함께 선조에게 천거하였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광해군이 선조의 명을 받아 분조를 행할 때 광해군을 따라 분조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발발시 일본군의 기만책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했습니다.
이때 정탁은 분노해있던 선조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순신을 변호하는 1298글자의 신구차 상소문(목숨을 구하는 것을 아뢰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립니다.
정탁의 상소로 인해 이순신 장군은 목숨을 건져 백의종군을 하게되었으며, 그 이후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명량해전 및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순신 장군을 살릴것도 대단하지만, 정탁은 정유재란이 발발했을때 72세의 고령임에도 갑옷을 입고 스스로 전장에 나가려했습니다.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조가 정탁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여 그 뜻을 접게됩니다.
이후 1600년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습니다. 1604년 호종공신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1605년 선조 38년 눈을 감았고, 그의 죽음에 선조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슬퍼하며, 제문을 내려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예천 도정서원과 정충사에 모셨으며, 시호는 ‘청백하게 절개를 지켰으며 덕을 쌓음에 게으르지 않다’는 의미의 정간 입니다.
임진왜란때 생각나는 문신들을 들어보라고 하면 류성룡, 이항복, 이덕형을 떠올리실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만큼이나 임진왜란때 조선이 승리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한 정탁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역사적 그날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순신 장군을 지킨 정탁 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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