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의 문을 열고., 스스로가 그 문을 닫았던 군주가 있었으니 그는 후백제의 창업 군주인 견훤입니다. 통일신라 말기 혼란한 상황 속에서 후백제를 세웠던 견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견훤 탄생설화입니다. 영웅들의 탄생설화에는 대단한 것들이 많은데, 견훤은 미물인 지렁이의 아들로 나옵니다. 그러나 지렁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지룡이 되며, 미물이 아닌 용의 아들인 것입니다. 또한 원 래는 지룡이었을 수 있으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패자인 견훤을 격하하기 위해 지렁이로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상주 출신인 견훤의 본래 성은 이씨지만, 성을 견으로 바꿉니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다 출세하여 상주를 다스리는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체격과 용모가 웅장했고,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했습니다. 성장하여 서남해 지방에서 공을 세워 변방 비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라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 호족들이 반독립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기근이 심해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의 봉기가 심했습니다.
892년 견훤은 몰래 무리를 모았고, 그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해서, 한 달 사이에 군사가 5천이나 되었습니다.
900년 견훤은 지금의 전주인 완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의 왕이 되었습니다. 관제를 정비하고 외교활동을 활발히 하여 중국 남조 국가들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910년 태봉국의 왕건이 나주를 정벌하자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이를 포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견훤은 왕건과 처음부터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왕건의 즉위를 축하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반 신라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를 공격해 920년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924년 조물성을 공격하였습니다. 925년 다시 조물성을 직접 공격했지만 왕건이 원군을 끌고 오자 고려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이후 거창 등 신라 20여 개 성을 공격해 점령을 합니다.
그리고 927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공격합니다.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에 나가 놀다 크게 당한 전투입니다. 경애왕은 자결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강제로 욕보임을 당했습니다. 그런 후 동생 김부에게 왕위를 잇게 하니 이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입니다.
돌아가는 길에 견훤은 팔공산 아래에서 왕건의 군대와 맞닥뜨렸습니다. 여기에서도 견훤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습니다. 공산전투에서 견훤은 대승을 거뒀고, 왕건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전사했으며, 왕건도 겨우 몸만 빠져나 갔습니다.
929년 의성부를 공격하였으며, 의성부 성주 홍술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왕건은 두 팔을 잃었다 말하며 슬피 울었다 합니다.
그러나 견훤의 기세는 여기까지였으며, 점차 왕건에게 밀리기 시작합니다. 고창 전투에서 8천의 사상자를 내며 패하고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932년 견훤의 신하 공직이 아들과 함께 왕건에 항복하며 고려에 귀부 해버립니다. 견훤이 공직의 남은 자식들을 잡아다 고문했지만, 조직을 강화하려 한 이 극단적 조치로 인해 공포심만 조장하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934년 왕건이 운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했지만 역습을 받고 대패합니다. 이 패배로 웅진 이북 30여성과 상달, 최필 등의 장수들이 고려에 항복합니다.
이후에도 부하 장수들이 견훤을 줄줄이 떠납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견훤의 패착은 왕위를 넷째 금강에게 물려주려 한데 있었습니다.
금강보다 위인 신검 등은 이를 알고 능환, 신덕, 영순과 일을 모의합니다.
935년 3월 정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을 왕으로 추대하였고, 견훤은 금산사에 가뒀습니다.
견훤은 금산사에 석 달 동안 갇혀있다 6월에 금성으로 탈출 후 왕건에게 투항 의사를 전했습니다. 지난날의 라이벌에게 의탁하러 간 것이니 인생은 참 알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라 부르며, 양주를 식읍으로 주며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이때 견훤은 왕건에게 반역한 자식을 죽인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겠노라 말했다고 합니다.
견훤이 투항하자 사위 박영규도 이듬해 투항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그러자 왕건은 936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합니다. 이때 견훤도 자식들을 벌하기 위해 함께 출정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습니다. 마침내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는 후백제의 군대에 대승을 거둡니다.
왕건은 이 전투에서 패한 신검 형제의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견훤은 후백제가 멸망하고 며칠 뒤 황산의 절에서 등창으로 죽었다 전해집니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습니다. 자신이 일으킨 후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하게 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후삼국시대의 주역이었던 영웅의 최후로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견훤에 대한 기록도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이었음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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