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조선 수군이 대패한 치욕의 해전 - 칠천량해전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동안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며, 원균의 무능력함으로 이순신 장군이 어렵게 키운 최정예 조선 수군을 한방에 궤멸로 이끈 전투였습니다. 칠천량 해전은 한국사 최악의 패배중 하나인 전투입니다다. 또한 지휘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통한의 패전 칠천량 해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명과의 화해협약으로 철군한 일본은 1597년 1월 조선을 재침하였으니, 이 사건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일본군 8개 군, 총 12만 명이 조선으로 건너가 남해안 있던 2만 일본군과 합세하여 조선을 치기로 계획을 세우고, 고니시와 가토가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임란때 바다를 재패하지 못한 일본군은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습니다. 요시라라는 이중간첩을 활용해 ‘가토군이 언제 바다를 건너올 테니 기다리다가 요격하라’고 유인했습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포로의 출정을 명했지만, 장군은 간첩의 말은 믿을 수 없다하며 출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토의 군대가 상륙하게되니 선조는 분노했습니다.
1597년 3월 4일 기토 기요마사를 잡을 기회를 놓쳤다는 죄목으로 이순신 장군은 투옥되었습니다. 4월1일 이순신 장군은 석방되지만 도원수 권율 휘하에 배치되어 백의종군을 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사로 있으면서 자신의 함대를 자침시켰던 원균이 이순신 장군님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원균은 다혈질에 지모가 부족했고 이순신 장군처럼 휘하 장병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보니 이순신 장군이 왜 출정을 꺼렸는지 알게되었고,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로 조정의 출격 명령에 불응했습니다.
권율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를 지키고 왜군이 들어올 길을 막아라 명했지만 원균은 가덕도와 안골포를 육군이 먼저 공격해주면 출정한다는 말도 안되는 장계를 올립니다.
1597년 7월 4일 드디어 원균도 출정 합니다. 그런데 이때 배에는 기생이 타고 있었다 합니다. 7월7일 부산포 근처에 이르러 왜선의 빈배 8척을 불태웠고, 이때 왜군 배 600여척이 조선 수군을 견제했습니다.
7월9일 부산포로 들어오던 왜군을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추격하다 12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아버렸고, 서생포에서 일본군이 공격하자 도망치기 바빳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달리 그는 후퇴하기 급급했습니다. 이때 2000명의 조선 수군이 사망합니다.
7월 11일 권율이 원균을 엄히 질책하고 곤장을 쳤는데, 이를 본 군사들은 통쾌해 했다고 합니다.
마지못해 7월 14일 부산포로 다시 출정했고,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절영도에 이르렀을때 풍랑이 심했습니다. 정박할 곳이 없어 계속 이동한 조선 수군은 지칠수 밖에 없었고, 군사들의 갈증이 심해 가덕도에 정박 후 물을 싣기 위해 수군 400명을 보냈습니다. 이때 가덕도에 있던 왜장 다카하시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게되는 조선 수군. 놀란 원균은 400명의 군사를 버리고 도망쳐버립니다.
이후 칠전도로 이동해 7월 15일 칠천량에 배를 정박합니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안전한 지역으로 후퇴해 정박할 것을 청했지만 원균이 거절하고, 거기에 더해 선상에서 폭음까지 했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무방비 상태로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도, 와키자카, 가토가 이끄는 왜군들은 7월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 양면 기습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7월 16일 새벽 4시. 와키자카의 왜군들이 칠천량을 급습했고, 2척의 왜선에 의해 전투선 4척이 불에 탔고, 이후 왜선 50척이 추가로 기습해왔습니다.
이때 원균은 자신의 배를 중심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살아남으려는 전선들이 탈출하기 바쁜 상황이었습니다. 왜군에 의해 판옥선은 각개 격파 당했고, 원균은 조방장 김완이 왜구와 사투를 벌이는 사이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때 원균은 술에 취해있었다 합니다.
원균은 대장선을 버리고 춘원포로 도망을 쳤고, 포위를 돌파할수 없자 판옥선은 남겨둔 채 상륙하여 도망칩니다. 이억기, 최호, 김완의 배를 제외하면 나머지 판옥선들은 전투 없이 그저 빈 배로 남아있다 왜군에 의해 불탔습니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후퇴하여 한산도에서 청야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12척이 명량 대첩의 주역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원균과 우치적은 춘원포까지 후퇴해 상륙했고, 원균은 도망치다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습니다
이때 조방장 김완은 거제도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최호와 이억기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하룻밤 최강의 조선 수군은 전멸하다시피 녹아없어졌습니다.
임진왜란을 일본의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서인 정한위략에 칠천량 해전 전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장수 시마즈 160척 격파, 도도 60여척 격파, 와키자카 16척, 나리도미 7백여명 참수 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왜군의 전투결과가 민간인에 대한 것도 포함하겠지만 적힌 내용만으로도 조선 수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7월 15일과 16일에 걸쳐 칠천량해전으로 입은 조선 수군의 피해는 판옥선 122척 ,소형 전투선 139척, 거북선 3척, 사망자 1만이었습니다. 임진왜란동안 조선 수군은 왜군에게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던 강군이었지만 무능력한 원균이 지휘를 하여 궤멸수준에 이르게 한것입니다.
칠천량 해전 참패는 원균의 무능함이 불러온 참사였던것입니다. 칠천량에서 기습을 받은 후 조금이라도 지혜롭게 대처를 했더라면 어떠했을지. 내륙으로 상륙해 도망치느라 조선 수군은 교전한번 제대로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패전은 패전이고 이후 수습만 잘 했더라도 수군의 궤멸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균의 무능함으로 인해 조선 수군은 패했고 남해의 재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선조는 원균의 칠천량 해전이후 조선 수군이 강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라는 지휘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선조는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라면서 장군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제수했습니다.
조선 수군은 해전사 사상 유례가 없는 말도 안되는 패전으로 소멸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이라는 지휘관을 만나 세계 해전사 사상 유례가 없는 말도 안되는 승리를 거두니 12척으로 300여척의 일본군을 이긴 명량대첩이 그것입니다.
칠천량 해전을 통해 리더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이순신 장군님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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