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왕건의 충신 신숭겸 장군의 무덤이 3개인 이유

 

고려를 개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왕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는데요. 전투중 죽을뻔한 고비도 있었지만 부하 장수로 인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요.

 

주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은 돌보지 않았던 충성스러운 왕건의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부하를 잊지 못해 슬퍼하며 무덤을 세개나 만들어준 태조 왕건.

 

이번에는 고려 왕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고려의 신숭겸 장군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신숭겸

 

신숭겸의 본관은 평산. 초명은 능산이며 평산 신씨의 시조입니다. 그는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태어났지만 활동 터전은 강원도 춘천시였습니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이 뛰어났던 인물이었습니다.

 

 

궁예 시절에 무장으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궁예 말년에 홍유, 배현경, 복지겸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개국 일등공신에 봉해집니다. 신숭겸 장군의 공은 고려 장수중 으뜸이었고, 왕건의 총애는 대단했습니다.

 

그는 뒤에 태조 왕건에게서 신씨를 사성받고 숭겸이란 이름을 받아 능산에서 신숭겸이 됩니다.

 

 

신숭겸이 왕건을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때 일입니다.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했습니다. "그대는 세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힐 수 있겠느냐" 물었고 이에 신숭겸이 활을 쏘니 태조가 말한 곳을 명중시켰습니다. 이를 본 왕건이 크게 칭찬하고 신숭겸에게 평주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을 주며 자손 대대로 조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라 불렀습니다.

 

이렇듯 공이 많고, 무용이 뛰어났던 왕건 제일의 무장 신숭겸은 고려 개국에 기여한 무장들 중에서는 김락과 더불어서 가장 일찍 죽음을 맞이합니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습니다.

 

후백제 견훤은 신라 조정의 친고려 정책에 무척 분노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울부(현재 영천)를 기습한 뒤 바로 신라 경주로 쳐들어갔습니다.

 

신라 경애왕은 급히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니 왕건은 경애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안심시키는 한편 친히 정예 기병부대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하게 한 뒤였으며 신라 땅 위에서 갖은 만행과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견훤이 백제로 돌아가던 중 급히 신라로 오는 왕건과 공산에서 마주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가 927년 경북 팔공산에서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사이에 있었던 큰 싸움인 공산전투 입니다.

 

 

처음 공산전투는 고려군에 유리하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자신한 왕건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고려군은 혼신을 다해 공격하였으나 백제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이때 왕건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신숭겸이 나서며 얘기했습니다. “제가 황제의 복장을 입고 나서서 싸우는 동안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라 말하며 왕건에게 자신의 지략을 따를 것을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왕건은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신숭겸은 왕건의 옷을 입고 어마를 타고 출정하였으며 김락과 원보, 전이갑,전의갑 등도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구사일생하는 왕건

 

이들은공격하라!” 라고 외치며 군사들과 함께 백제군의 진영으로 용감하게 달려가 싸웠습니다. 이 틈을 타서 왕건은 일반 군복을 입고 백제군 수중을 벗어나 개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신숭겸과 김락,전이갑,전의갑은 백제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고, 왕건의 갑옷을 입고 있어 신숭겸의 시체를 왕건으로 오인한 백제군은 신숭겸의 목을 베어 견훤에게 가져갔습니다.

 

 

훗날 신숭겸의 시신은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찾았지만, 머리가 없었기에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같이 매장했습니다.

 

또한 왕건 본인이 생전에 잡아둔 묘자리가 있었는데, 신숭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자신의 묘자리를 그에게 양보했습니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세 개입니다. 이는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고려의 건국공신이며 왕건의 무한한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신숭겸은 자신의 주군을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은 충신 중의 충신이었습니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자신이 새운 나라를 자신이 무너뜨린 왕. 지렁이의 아들인가 지

후삼국 시대의 문을 열고., 스스로가 그 문을 닫았던 군주가 있었으니 그는 후백제의 창업 군주인 견훤입니다. 통일신라 말기 혼란한 상황 속에서 후백제를 세웠던 견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blogdaitso.com

 

명성황후 민비는 조선의 국모가 아니다 - 역사왜곡으로 너무나 미화된 민비의 악행

역사 왜곡으로 미화가 된 민비의 악행 역사왜곡 드라마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극의 재미와 시청률을 위해 그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blogdaitso.com

 

반응형
교차형 무한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