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일본군 제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의 최후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했으며 부산진성, 다대포성, 동래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한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던 임진왜란 왜군 선봉장, 제1선발 무장이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 입니다.
임진왜란의 제1선발로 조선의 국토를 유린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최후는 어떠했을까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가 사망하기까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카이 지역 약재 무역상이자 기독교 세례를 받은 고니시 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 유키나가는 류사가 교토에 있었을 때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장성한 유키나가는 처음에는 비젠의 영주 우키타 나오이에의 가신이 되어, 주로 외교 사자로 일했습니다. 이후 우키타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에 항복하고자 할 때 교섭의 담당자가 되었고 이 당시 노부나가 군의 총사령관인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을 하는 하시바 히데요시와 교섭을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요시는 미쓰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 사후의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니시는 아버지 류사와 함께 세토 내해의 쇼도 섬을 관리하며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총책임이 되었습니다. 이후 규슈 정벌 등에 전공을 세워 1588년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히고를 공동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히고의 남부를 영지로 하사 받은 유키나가는 우토 성을 새로 축성하여 자신의 거성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유키나가와 기요마사가 히고를 남북으로 분할하여 통치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자주 발생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잦은 의견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시도했습니다. 그의 사위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국왕이 입조 할 것을 소 요시토시를 통해 조선에 전달하도록 지시했지만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고 있던 대마도는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로 인해 조선과의 관계 악화를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강압으로 인해 대마도주 소요시토시는 직접 한양으로 건너갔습니다. 다만 히데요시의 요구를 조선 조정에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기에 히데요시가 요구한 조선 왕의 입조 대신 조선 측에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한다고 말을 바꾸어 전했으며 1590년 조선에서는 이를 수락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조선 통신사가 항복의 사절인 줄 알고 있었고 조선 측에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길 안내를 하라는 정명향도(征明嚮導) 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너무나 어이가 없던 조선 통신사는 대마도주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소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뜻이 명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라고 말을 하며 이 위기를 넘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말장난일 뿐 조선 측 입장에서는 그 어느 쪽도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일본 측의 요청을 무시했고, 히데요시는 본격적으로 조선 침략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할 대군을 9번대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했습니다.
왜군의 선봉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맡게 되었는데, 둘은 제비뽑기를 했고 그 결과 유키나가가 먼저 조선에 상륙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제1번대 주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1870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고, 제2번대 주장 가토 기요마사는 병력 22800명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했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고니시는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진성을 함락시켰고 같은 날 동래성 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왜군은 개전 열흘만에 경상도를 장악했으며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당시 최강의 맹장이었던 신립을 파견해 왜군을 막도록 명하였습니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군대와 조우한 고니시는 유인작전을 펼쳐 신립의 기병대를 늪지대로 유인한 뒤 조총과 활로 섬멸시켰습니다.
신립의 조선군을 격파한 고니시는 큰 저항 없이 개전 20일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에 입성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벌써 조선의 임금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빤스런을 한 뒤였습니다.
이후 평양성까지 입성한 고니시. 하지만 이때부터 명군이 참전을 합니다.
명의 선발대로 조승훈이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고니시의 왜군에게 패퇴하고 맙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군이 평양성을 포위하자 고니시는 평양성을 버리고 한양으로 퇴각합니다.
고니시의 퇴각에는 이순신 장군님의 남해 제해권 장악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양으로 퇴각한 후 왜군은 명과의 강화 교섭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정전을 위한 교섭이 결렬됨에 따라 1597년 8월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정유재란이 다시 시작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앙숙인 가토 기요마사가 1군 사령관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그는 제 2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때 고니시는 요시라라는 첩자를 이용해 기요마사군의 도해 날짜와 진로를 조선 측에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유키나가가 제공한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기요마사 군을 공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탄핵을 받아서 파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고 맙니다.
고니시를 포함한 왜군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으며, 이때 사살당한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는 소금에 절여져 일본으로 보내집니다.
고니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대비해 순천에 왜성을 축조하고 거점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복귀와 전국 의병의 항쟁, 명나라 군의 가세로 전황은 왜군에 점점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1598년 음력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 있는 왜군에게 철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순천 왜성에 갇혀 버린 고니시는 명 수군 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써 해상의 포위망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순신장군님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고니시는 퇴로를 열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였습니다.
노량해전에서 고니시는 원군으로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격전을 벌였으나 참패, 겨우 목숨만 건져 본국으로 퇴각했습니다.
이렇게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끝이 납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절대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이후 일본 정국을 주도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이런 도쿠가와 이에야쓰에게 대항하던 세력이 히데요시 세력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를 필두로 한 문치파였습니다.
문치파와 대립하던 가토 기요마사를 필두로 한 무장파는 미쓰나리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정도였으며 결국 미쓰나리와 대립하던 이에야스에게 동조하게 됩니다.
고니시는 임진왜란 당시 강화 교섭을 함께 주도한 사이였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편에 서게 됩니다.
1600년 음력 9월 도요토미 가문의 수호를 내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타도를 위해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이시다 미쓰나리에 호응해 서군의 주요 다이묘로서 참전했습니다.
고니시는 야전에 강한 이에야스를 의식하여 농성하는 쪽을 제안했지만 미쓰나리는 먼 길을 행군한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해 전면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며 고니시의 조언을 묵살했습니다.
음력 9월 15일, 아침부터 세키가하라에 진을 치고 있던 양측 병력이 맞붙었습니다. 개전 초기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백중지세였습니다. 하지만 서군에는 사전에 이에야스와 내통한 자들이 많았고, 어디에 붙을지 눈치를 보는 이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군의 우측 날개를 담당하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면서 서군의 측면을 급습했고, 백중세였던 전투는 급격히 동군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고작 몇 시간 만에 동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해 탈출했다 다시 붙잡힌 고니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주범이 아니었기에 사무라이가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할복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고니시는 기독교도 였습니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엄격히 금기시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리하여 고니시는 할복 대신 참수를 선택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는 음력 10월 1일 교토의 로쿠조가하라에서 참수됩니다.
고니시가 처형이 된 이후 그이 가문은 완전히 멸문이 되었으며, 그가 소유했던 영지도 그의 앙숙 가토 기요마사가 차지하게 됩니다.
조선을 침공해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학살했던 왜군 제 1선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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