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님에게 대패하고 미역 장군이 된 와키자카 야스하루
임진왜란 치욕의 패전 중 하나였던 용인전투. 용인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하지만 이후 이순신 장군에게 죽다 살아난 그였습니다.
영화 한산에서 변요한씨가 연기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554년 오우미 (현 시가현)에서 출생하였으며, 원래 이름은 다무라 진나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여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양자가 되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됩니다.
본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지만 1573년 아자이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하면서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장이 됩니다.
이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스히데를 떠나 하시바 히데요시(=도요도미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의 가신이 됩니다. 이후 쥬고쿠 평정전에서 활약했으며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히데요시의 통일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 받습니다.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사후 후계자를 놓고 시바타 카츠이에와 시즈가타케에서 전투를 벌일 때 자신의 시종이자 경호를 담당하기 위해 가까이 있던 근위 시동들에게 공을 세우라며 출전시킨 부하 7명 중 한 명이 와키자카였습니다. 이를 줄여 칠본창이라고 하는데요.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히라노 나가야스, 카타기리 카츠모토,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스야 타케노리 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칠본창 중에 와키자카가 있음을 알고 "와키자카 따위랑 동급 취급이라니!" 라며 불쾌해했다고 합니다.
이후 와키자카는 1585년 무렵부터 수군을 지휘합니다.
그는 규슈 시마즈 정벌 당시 분고 우스키 성의 오토모 소린 앞으로 군량미를 수송하였으며, 사쓰마 히라사 성 공략에 있어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공격해 함락시켜 공을 세웁니다. 또한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 성 공략전에서도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성을 봉쇄하는 활약을 합니다.
이렇게 와키자카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수군을 담당하게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군으로 참전하였으며, 육군을 따라 한양까지 진격합니다.
이후 1592년 음력 6월 도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던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조선군 5만의 공격을 받지만, 자신의 1600의 병력을 이끌고 기습하여 조선군에 승리를 거두니 이 전투가 임진왜란 치욕의 패전인 용인 전투였습니다.
용인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무능함을 보여주었던 전투로 전시상황이었지만 방비도 없이 밥을 지어먹다 와키자카군이 기습하여 승리한 전투로 조선군은 먹던 밥도 버리고, 무기도 내팽게치며 살기 위해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와키자카 역시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저 깜짝 기습공격을 해본것 뿐인데, 5만대군이 이렇게 쉽게 도망가버릴 거라고 그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1600명의 군대로 5만 조선군을 격파했고, 조선의 도성 탈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전공을 세운 와키자카는
한순간에 일본군 영웅이 되었습니다.
<<한국사 가장 치욕스러운 패전 임진왜란 용인전투 알아보기>>
이에 기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를 본업인 수군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 명을 받아 든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을 마구 짓밟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만날 상대가 이순신 장군이었다는 것을, 자신의 참담한 미래를 알지 못했을 겁니다.
1592년 음력 7월. 용인전투의 달콤함을 한 달 정도만에 잊게 만들어줄 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왜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해군에 의해 옥포(거제도), 사천(삼천포), 당포(충무), 당항포(고성) 등에서 참패를 당한 후 설욕하기 위해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이순신 장군님이 이끄는 조선의 함대는 적함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하였으니 이 전투가 한산대첩입니다.
한산도대첩으로 왜선 59척 격침되었으며 12척 포획하였으며, 사망자만 8,980명에 달 할 정도로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와키자카는 조선의 추격 선단을 피해 달아나다가 무인도에 갇히게 되었고, 10여일 정도 미역만 먹으며 생명을 연명했습니다.
그러다 조선 수군이 수색을 그만두고 철수하자 부서진 배들의 잔해로 뗏목을 만들어 겨우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일본에 돌아간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부풀리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을 하였고 이 날의 쓰디쓴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해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날짜에 그의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현대의 후손들은 한산도 대첩하면 집안에서 미역만 먹는 날이라고 언급할 만큼 한산도 대첩은 그들에게 치욕적인 전투였던 것입니다.
이후 정유재란이 다시 발발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 참가하여,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며 한산도 대첩의 치욕을 되갚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전투인 명량대첩에서 또 한 번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이후 와키자카는 노량해전이 발발하기 전 미리 다른 일본군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의 패권을 두고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와키자카는 이시다 미쓰나라의 서군으로 전투에 참가합니다. 원래 와키자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려 했지만 야스하루가 오사카에 머물 시점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였고, 어쩔수 없이 서군이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리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고 세키가하라 전투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으로 갑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161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오사카 전투에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차남이자 적자였던 와키자카 야스모토를 대신 보냅니다.
1615년 그는 야스모토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교토로 떠나 칩거합니다. 이후 1626년 음력 8월 6일 73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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