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를 악랄하게 고문한 친일 경찰 고문왕 노덕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악랄하게 고문했던 악질 친일파가 있습니다.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였던 의열단의 수장 김원봉을 체포하여 그에게 모욕적인 치욕을 안겨주어 월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인물.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이 마쓰우라 히로. 그의 이름은 바로 노덕술 입니다.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 살해한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노덕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노덕술은 1899년 경상남도 울산 출생으로 일본 홋카이도로 취직을 위해 건너갔다 곧 귀국하여 1920년 6월 경찰관을 지원하여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됩니다.
같은해 9월에 경남순사교습소를 졸업한 뒤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를 거쳐, 울산경찰서 사법계에 근무하였으며 순사부장을 거쳐, 1924년 12월 경부보에 승진하고 의령,김해,거창,통영 등 각 서의 사법주임을 맡게됩니다.
노덕술은 독립운동가 체포 및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인물입니다.
일제가 조선인 중 자신들의 명령 및 지도를 따르지 않고 저항 및 반항을 하는 조선인들을 지목하여 만든 용어인 불령선인.
불령선인으로 찍힌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하는데 앞장서서 활약했으며, 심한 고문으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고문으로 엄청난 활약을 하여 일제의 눈에 들었고, 일사천리로 승진을 하며, 일제로부터 훈8등서보 같은 수훈까지 받습니다.
친일 고문경찰 하면 노덕술이라 인식될 만큼 이 방면에서 유명한 인간이었습니다.
1928년 동래경찰서 재직 중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잡아들여 고문했으며, 이때 독립운동가 3명 그의 악랄한 고문으로 사망합니다.
1928년 부산동맹휴교 사건으로 혁조회가 적발되었을때 노덕술은 혁조회의 회장 김규직외에 9명을 추가로 더 체포하여 고문했으며 김규직, 유진홍, 양정욱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1929년에는 조선인 일본 유학생 강연회의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고문하였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 참가자들과 관련자 석방을 주장한 동맹휴학 관련자들도 잡아들여 고문했습니다.
1932년 경부로 승진해 울산과 서울 본정, 인천, 개성, 양주, 종로경찰서 사법주임을 역임한 후,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하여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4년 수송보안과장을 맡습니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취조하여 본인의 영달을 꿰한 비열한 인간이 노덕술입니다.
이후 해방이 되었지만 노덕술은 죗값을 치르기는 커녕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 알았고, 국회의원까지 출마하는데요. 왜 이런일이 일어났을까요?
해방이 되고 노덕술은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다 공산주의 세력에 체포가 되어 몇달은 구금되었지만, 이후 1945년 말에 월남하게됩니다.
1946년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에 있는 반이승만 세력을 찾아내 숙청하고,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게 됩니다.
1946년 4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의 암살범 일당을 검거하여 경찰 지도부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승만에게는 반공투사라는 극찬까지 받게됩니다.
또한 앞서 언급했지만 의열단 단장이었던 독립운동가 중 최고 거물 김원봉을 체포하였으며 일제의 앞잡이였던 그가 김원봉에게 모욕적인 치욕을 주기까지합니다. 이 일로 김원봉은 몇날 몇일을 분해서 울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요. 노덕술에 의해 체포가 되고 치욕을 겪는 사건으로 인해 김원봉이 월북을 하는 계기가 됩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드디어 노덕술은 체포가됩니다.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그가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까지 밝혀집니다. 이때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따르면 1949년 노덕술의 재산은 60~70만 원에 달할정도로 막대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60~70만원이면 80kg 쌀 8만 가마를 살 수 있었으며,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은 600억이 넘는 전재산을 조국 해방을 위해 사용했는데, 노덕술은 일제의 개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이며 일제에 충성하며 100억이 넘는 재산을 모았다고 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600억 전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에 사용하고 굶주림으로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이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제거가 될 줄 알았던 노덕술이었는데요. 하지만 그는 이승만 덕분에 무사히 풀려납니다.
당시 이승만은 노덕술이 체포되자 노덕술은 그저 치안기술자일 뿐이라며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직접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합니다. 이후 노덕술은 이승만 덕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무죄판결까지 받게됩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인지...
이후 노덕술은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헌병 중령으로 변신합니다.
1950년부터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 등을 지내다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납니다. 1956년 군에서 예편한 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갑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울산군 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고, 41,109명 중 1,744표(4.24%)만 얻어 전체 후보 여덟 명 중 여섯 번째로 낙선합니다.
이후 1968년 4월 68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악랄하게 고문하여 사망에 이르게까지 한 노덕술은 잘 먹고 잘 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들은 열악한 환경에 살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한 자들과 그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볼때마다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친일 잔재 청산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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