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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아리

 

 

여진족 무쌍 소드마스터 사묘아리

 

고려의 무쌍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척준경. 그는 한국사 최강의 장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활약했던 동시대에 여진족의 금나라에도 척준경과 같은 무쌍 소드마스터가 존재했습니다.

 

그 이름은 사묘아리.

 

 

여진족의 장수로 고려군과 송나라 군과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명장입니다. 육지전뿐 아니라 해상전 어디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는 금나라 최강의 장수. 그는 충직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인성도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전쟁에서 수많은 업적을 기록한 맹장이며, 후에 왕에 봉해졌으며, 78세에 숨을 거둘때 그의 시호는 지혜롭고 민첩하다는 뜻의 지민이었습니다.

 

 

고려의 정사 기록에 척준경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며 사묘아리의 업적은 금나라 정사인 금사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금사 사묘아리 전에 기록된 많은 무훈 중 몇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고려가 윤관의 17만 대군으로 여진 정복을 시도하자 이를 막기 위해 사묘아리는 그의 아버지 혼탄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목리문전에서 고려 대군과 교전을 벌일 때 고려군 장수를 창으로 찔러 죽이고 여진 사기를 올려 고려군을 격퇴했습니다.

 

이후 석적환 병력과 합류한 그는 선봉에 서서 고려군을 박살내며 2개 성을 탈환했습니다. 다시 고려군 5만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으나 사묘아리의 방비에 별다른 소득 없이 퇴각했습니다. 이에 퇴각하는 고려군을 추격하여 갈라수 라는 곳에서 고려 후위 부대를 만났습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고려군은 여진의 공격에 당황했습니다. 사묘아리는 전면에 나서서 고려군을 학살했고 그로 인해 고려 후위부대는 전멸합니다. 다시 5만 고려군을 공격해 퇴각시켰습니다.

 

 

얼마 뒤 고려 오연총의 7만 대군과 조우하였고 이때도 선봉에서서 돌격했고, 고려군과 대회전을 치렀습니다. 갈라수 전투에서 사묘아리의 맹활약으로 고려는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고, 이때 입은 고려군의 피해는 최대 7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여요전쟁 당시 고려군이 거란군에 대패한 통주전투 이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습니다.

 

 

전투후 사묘아리는 석적환으로부터 "네가 하루 동안 강한 적을 세번이나 격파했으니 그 공을 어찌 잊겠느냐" 는 말과 함께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사묘아리는 고려의 타길성 공선전에 참전하여 성벽을 뚫어 성을 함락시키는 무공을 세웠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사묘아리는 고려의 여진 정벌 계획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일조합니다.

 

그는 거란국인 요나라 정벌 때도 많은 공을 세웁니다.

 

금 태조

 

태조를 따라 거란의 영강주를 함락하고 맹안(병력 1)을 수여받았고, 신주와 빈주를 함락시켰습니다. 요나라 수만명의 대군이 홀사리성을 공격해 왔을 때 그에게 겨우 100개만 있었습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100기 군사들의 옷을 찢어 깃발을 많이 만들어 군세를 많게 하는 전략을 세워 수만 요나라 군을 철군시켰습니다.

 

항복했다가 다시 배신한 소주와 복주의 10만 반란군을 벽리밀한수 상류에서 격파하고는 거의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로인해 시체로 강물이 막혀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란과 해족이 1000척의 배를 이용해 바다로 도주하자 사묘아리는 27척을 이끌고 추격했습니다. 화살에 두번이나 맞아 위태로웠지만 힘껏 싸워 거란과 해족을 격파하고 1000척의 배를 모두 획득했습니다. 거란 수만 병력이 호리특채를 공격해오자 사묘아리는 800명으로 이를 격파했습니다.

 

송나라와의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요.

 

1126 1차 개봉 포위전에서 사묘아리가 교각을 확보하며 황하를 건너 힘껏 싸웠습니다.

 

 

다음해인 1127년 다시 송을 정벌하자, 사묘아리는 보주와 중산에 이르러 적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1128년 남송의 고종을 토벌하였고, 양곡현과 신현을 취하고, 해주의 남송군 8만을 깨뜨리고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또한 적선 10000척을 양산박에서 격파했고, 도적이 범현을 공격하자 격퇴하고 배 700척을 획득했습니다.

 

남송의 장수 강민이 장삿배 400척을 모아 수춘 인근에 있을 때 400기 병사로 강민을 격파하고 수천의 목을 베었습니다.

 

당해 및 대고와 함께 해남에서 적 10만을 격파했고, 200척을 획득했습니다.

 

남송이 신하를 칭해오자 희종은 공이 많은 사묘아리에게 천만 전을 하사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사묘아리전에 기록된 그의 업적 중 일부입니다.

 

그는 전시에 늘 머리를 묶고 종군했고, 수십 번의 전투를 승리했습니다.

 

 

남송 정벌전부터 수전을 익혀 수성이라 불리었고, 동시기 척준경과 비견되는 맹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묘아리는 척준경과 달리 천수를 누리고 평안하게 만년을 보냈습니다.

 

고려와의 갈라수 전투 때 윤관의 곁에 늘 척준경이 있어서 척준경과 사묘아리가 조우하지 않았을까 많이들 추정합니다. 하지만 실제 두 인간 병기가 맞붙었다는 기록이 없어 아쉬움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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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쌍 척준경과 여진 무쌍 사묘아리가 붙었다면 누가 이겼을까요?

 

너무나 궁금하지만 역사적인 그날에 이루어지지 않은 대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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