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아들 비운의 왕세자 이황
조선의 왕들 중 폭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인해 왕 자리에서 끌려내려온 암군이 연산군입니다.
연산군이 왕으로 있을때 세자였던 그의 아들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폐세자 이황입니다.
연산의 아들인 이황은 중종반정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폐세자 이황(1498년1월10일~1506년10월10일)은 조선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였습니다.
위로 형이 한명 있었지만 요절하여 이황이 적장자대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폐세자 이황은 아버지 연산군보다는 어머니 거창군부인 신씨를 닮아 성품이 차분하고 굳세고 엄숙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세자시절 기상이 성군이었던 할아버지 성종을 빼어 닮아 많은 이들로부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고 합니다.
이황은 총명하고 제왕의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황이 아무리 제왕의 기질을 갖고 있다고 해도 아버지 연산군의 폭정을 일삼아 조선 최초의 반정인 중종 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왕 자리에서 끌려내려왔으며 세자 이황은 폐세자가 되어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는 이가 없어 배를 굶는일이 허다하여 몰래 남의 밭으로 가 감자를 훔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얼마전까지 한 나라의 세자였던 자가 경험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을 겪게된 폐세자 황.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506년 숙부이자 반정으로 왕에 추대된 중종이 9월 24일 창녕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과 함께 이황을 사사하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9살이었습니다.
반정공신들은 연산군의 아들들이 살아있으면 언젠가 자신들처럼 왕자들을 내세워 반정을 일으킬지 몰라 연산군의 아들들을 사사하라고 중종에게 주청을 올렸고 계속 반대를 하던 중종도 강권에 못이겨 조카들을 사사하란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후 중종은 조카들의 장례라도 후하게 치러주려고 했으나 공신들은 이마저 관곽이나 써주면 후한 것이라며 묵살했습니다.
폭군 연산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9살의 나이에 사사된 폐세자 황.
할아버지를 빼닮아 성군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폭군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꽃도 피워보지 못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세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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