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을 살린 전화기
우리나라에 전화기는 최초로 언제 들어왔을까요?
1882년 3월 어느 날 청나라 톈진 유학생 상운이 귀국길에 전화기와 전선 100m를 가져왔다는 기록과 1893년 11월 조정에서 지금의 세관에 해당하는 총해관을 통해 "일본 동경에서 구입해 들여오는 전화기와 전화기 재료 등을 면세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언제 들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 들어온 신문물인 전화기.
이 전화기가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인 백범 김구선생을 살렸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전화기가 없었다면 백범 김구선생도 없었고, 그의 독립운동 활동도 없었을 것인데요.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민비 시해 사건의 가담자였던 츠치다 조스케를 김창수라는 젊은이가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끝내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을 치하포 사건이라 하는데요. 이 김창수라는 젊은이가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사건 직후 김구 선생은 피신했지만 이후 체포가 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3개월 후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이 시작되었고, 선생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와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그 전화의 주인공은 고종으로 김창수 사건을 보고 받고 사형집행을 멈추라 명한 것입니다.
'덕수궁에서 왕후를 살해한 일본인들 중 하나로 지목된 인물을 조선인 청년이 살해를 하였는 죄목으로 지금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이 덕수궁에 설치된 전화기를 통해 급히 명을 전달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전화기가 개통된 지 단 4일밖에 안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전화를 통해 서울에서 인천으로 연락을 바로 할 수 있어서 김구 선생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화가 없었다면 고종이 김구 선생을 살리라 명했더라도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동안 벌써 사형집행이 끝이 난 후였을 것입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만약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전화가 없었다면 김구 선생도, 김구 선생이 하셨던 독립운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흔하고, 휴대까지 하고 다니는 전화지만, 이 전화가 김구 선생을 살렸다는 것 한번 알고 가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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