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송희립 장군
임진왜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에 23전 23승이라는 어머어마한 전적을 남기신 이순신 장군님.
그런 이순신 장군님의 최측근에서 장군을 보좌하며 임진왜란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송희립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님을 다룬 각종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장군님 옆에서 늘 장군을 보좌하는 사람이 한명 있는데, 그 사람이 송희립 장군입니다.
송희립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53년 전라도 흥양현 대강면 마륜리에서 현감을 지낸 송관의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위로는 형 송대립과 아래로는 동생 송정립이 있으며 삼형제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합니다.
송희립은 1583년 별시로 치른 무과에 병과 159위로 급제하였고, 1591년 이순신 장군님의 직속 군관이 됩니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동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핵심참모로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을 떨쳤던 인물입니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서 5월 1일 거제에서 왜병을 격파하였으며, 남해 앞바다에 머물며 원균 등과의 합동작전을 주장하였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일본군이 침략해오자 겁에질려 자신의 함대를 스스로 자침시키고 도주하여 경상도 바다가 위험에 빠졌을때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으면 본 도 역시 보전할 수 있다"며 출전할 것을 말한이도 송희립이었으며 이 말을 들은 이순신 장군님은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는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 대첩, 부산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이후 이순신 장군님이 조정의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한양으로 압송돼 고문을 받을때 정경달, 정탁, 황대중과 함께 대궐 문앞에서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이순신 장군님의 무죄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노력했고, 그 결과 이순신 장군님은 사형을 면하고 권율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 하게됩니다.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후 이순신 장군님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자, 다시 이순신 장군님의 휘하가 되어 조선 수군 재건에 일조하였으며, 1597년 명량대첩에서도 활약을 하게 됩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진린에게 화친을 청하며 퇴로를 열어줄것을 청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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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니시는 사천에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에 있는 소 요시토시에게 함대 500척을 모두 노량 앞바다로 집결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를 알게 된 이순신은 송희립에게 노량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물었는데 송희립은 명군과 조선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을 가해야 하며 그렇게 되면 군사들은 군량이 고갈되고 사면이 고립되니 고니시는 살안나갈 수 없을 것이라 답합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후 육지와 바다에서 몇 개월 동안 봉쇄 작전을 펼치자 고니시의 일본군은 세력과 사기가 꺽이었고, 다시 진린에게 화친을 청하지만, 이번에도 이순신 장군님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송희립은 다시 화친에 응한다 해도 일본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이 분명하며 넓은 바다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넓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가 이순신 장군님이 전사하신 노량해전입니다.
1598년 11월 18일 밤 10시쯤 조선 해군은 야음을 틈타 조명연합함대 146척을 앞세워 선제공격에 나섰고, 왜선 500여 척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전투 중 명나라 전선이 갑자기 집중포위를 당해 여기에 탑승해 있던 명나라 진린 제독이 위험에 처하자 송희립 장군은 왜군들의 집중포화를 뚫고 진린 제독을 구출합니다. 이 과정에서 적들에게 노출되어 송희립 장군은 전신에 중상을 입습니다.
노량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조선 수군은 그들의 리더 이순신 장군님을 잃는 아픔을 겪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이순신 장군님이 전사하며 승리한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까지 송희립 장군은 이순신 장군님의 휘하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송희립 장군은 1601년 5월에 양산군수가 되었으며, 8월에는 다대포 군수가 됩니다.
이후 1611년 전라좌수사에까지 오릅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났던 1623년 12월에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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