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과 함께 일본 수군을 박살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조선의 재해권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잡혀가 조사를 받을때 무죄를 적극 변론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
이억기 장군은 조선 왕실의 먼 친적이었던 인물로 정종의 10째 아들인 덕천군의 현손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과 동명이인이었던 무의공 이순신이 양녕대군의 6대손이고, 당시 왕 선조는 세종대왕의 6대손이므로 선조와 무의공 이순신과 이억기장군은 14촌 관계였습니다.
이억기 장군은 어려서 부터 무예가 뛰어났으며 17세에 왕가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부서인 사복시의 내승이 되었습니다.
그 뒤 10대에 무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쳤습니다.
21세에는 종 3품 경흥도호부사로 임명이 되었으며, 두만강을 넘어온 여진족을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웁니다.
26세에는 함경도의 가장 북쪽 지역인 온성도호부의 온성도호부사가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 전투의 결과로 압박을 받을때 이억기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편을 들어주면서 둘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억기 장군은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국방상 요직을 역임했으며, 1591년 순천부사를 거쳐 정3품 당상관인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전투 등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합니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 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 준비를 도왔고,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데 이순신 장군 다음의 공을 세운이가 이억기 장군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조정의 출정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되자 이항복, 김명원 같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이순신 장군은 죄가 없다는 서신을 보내며 적극적인 변론을 한 사람도 이억기 장군입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통제사가 된 원균 휘하에 있게 된 이억기 장군.
조정의 무리한 진격 명령을 받고 부산포의 일본군을 공격하다 여의치 않아 거제도 칠천량까지 내려온 무능력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 여기에서 일본 수군과 칠천량 해전이 발발했고, 조선 수군은 재기 불능 수준의 대패를 하고 맙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자신만 살려고 부하들과 배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이억기 장군은 최호 장군과 함께 일본군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 판옥선에서 장렬히 전사합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무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지켰던 것입니다.
전투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서 아차산에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으며, 이후 하남시 배알미동에 신도비를 세웠습니다.
1592년 6월 5일 당항포해전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공적은 이순신 장군에 못지 않았으나 1592년 5월의 옥포, 사천, 당포 해전 등의 초기 해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관계로 전란 후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됩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부하들과 배를 버리고 도망쳤던 원균이 선무공신 1등이라는 점에서 분노가 한번 더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해군은 장보고급 잠수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이억기함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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