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
한때 얼짱 황족으로 뉴스에 까지 실렸던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
이우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일본에 의해 멋대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 되는 등 불운을 겪었던 망국의 왕자였습니다.
이우는 고종의 손자이자 순종의 조카로 그의 아버지는 의친왕 이강 입니다.
1912년 11월 15일 의친왕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우는 심약한 성격의 형 이건과는 달리 일제에 반항적이었고, 사사건건 대립해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의 양자가 되어, 일제 때 왕가의 일원으로서는 양아버지 영선군 이준용이 갖고 있던 공(公)의 지위를 계승합니다. 따라서 이우는 공작이 아니라 공이 맞으며 이우 공으로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받았지만 대략 황족과 화족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 공이라 보시면 됩니다.
이우는 경성유치원과 종로소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11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유년학교에 입학합니다.
1926년 12월 1일 공포된 '왕공가궤범'이 있는데 이는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왕, 왕세자, 왕세손, 공은 만 18세가 되면 육군, 해군 무관으로 임관해야 한다'는 내용의 정책입니다. 그로인해 이우는 일본의 강압 속에 선택의 여지없이 193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45기로 졸업하였고, 1941년 육군대학까지 졸업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왕족과 일본의 황족을 결혼시키는 정책을 펼쳤는데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도 그로 인해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결혼한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우는 일제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기에 일본인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조선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고집합니다.
일제가 이우를 일본 황족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와 결혼시키려 하자, 급하게 친일파 박영효의 서손녀인 박찬주와의 결혼을 확정 지어버립니다.
친아버지 의친왕도 “친일파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다”라고 했기에 성사된 약혼이었고, 이를 알게 된 일본은 이 약혼을 무효로 만들려 했지만 친일파 박용효가 일제를 겨우 설득해 결혼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우와 박찬주 둘 사이의 부부 금슬은 좋았으며 이청, 이종 아들 둘이 태어납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황족 신분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을 순시했습니다.
1944년 3월에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일본군의 만주 일대 후방 경계 부대였던 제1군 사령부 참모 장교로 1945년 5월까지 근무했으며, 이후 1945년 6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 오면서 본토 방어 결전을 대비해
히로시마 제2총군 교육 참모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부임 전 휴가차 들른 서울에서 갑자기 병이 났고, 이우가 병에서 회복되자 이번에는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아들을 돌보느라 계획보다 1달 늦어진 1945년 7월에 히로시마에 부임했습니다.
이우는 이때 부임하면서도 일본에 가면 살아오지 못할 것을 직감해 전역 신청도 하고 시간도 끌어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강제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가족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가겠다" 말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부임한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에 미국은 일본인을 대량 살상하여 항복을 강요하기 위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요.
이우는 이날도 기마 헌병 2명의 호위를 받으며 애마를 타고 출근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폭심지로 부터 700m 밖에 안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서 이우가 피폭을 당합니다.
이우는 원폭 이후 8시간이 지난 오후 4시경 발견이 되었으며,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다고 합니다.
서둘러 인근 해군 병원으로 이송했고, 잠시 뒤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불행 중 다행” 이라며 이우는 살아난 것에 기뻐했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폭 증상을 보인 후 피폭 다음 날인 8월 7일 오전 5시경 사망합니다.
1945년 8월 서울 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흥선 대원군 묘역인 흥원에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잘생긴 외모를 갖고 있던 이우. 과거나 현재의 미남 기준에도 완벽하게 부합되는 굉장히 잘 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는데요.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얼짱 황손 이우 왕자는 겨우 33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강제로 복무를 종용당해 원폭 피폭으로 사망한 것도 억울할 텐데, 더욱 원통한 일이 발생합니다.
1959년 일본이 가족의 동의도 없이 전범들이 모여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이우 왕자의 위패를 봉안한 것입니다.
일본의 억지 주장에 따르면 사망 당시 일본인이었으니 일본 신사에 묻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조선 왕족을 일본 왕족처럼 대하겠다고 했는데 야스쿠니 신사에 이우 왕자를 봉안할 때도 이우를 왕족의 지위로 했어야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우의 가족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일반 병사로 취급하여 합사 해버렸던 것입니다.
이우는 일제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인물인데, 죽어서까지 전범들과 함께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나라가 힘이 없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원폭으로 사망한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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