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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흥 장군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의 영웅 남이흥 장군

 

정묘호란 후금군에게 밀려 죽기 직전 적에게 화약고가 넘어가는 것을 막고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남이흥 장군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수가 아니다보니 생소한 분들이 많으실텐데요.

 

하지만 그 용맹함과 불굴의 투지는 후대에 기억이 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남이흥 장군

 

남이흥 장군은 안주목사, 연안부사 등을 역임한 무관입니다.

 

남이흥은 조상 대대로 무공을 세운 충신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기골이 장대하고, 어려서부터 강직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합니다.

 

 

그의 아버지 남유는 나주목사 겸 좌영장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을 섬멸하다 적탄에 맞아 전사한 인물입니다.

 

남이흥은 아버지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고,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으로 글 공부를 포기하고 무예를 익혀 1602 27세에 무과에 급제합니다.

 

29세에는 장연현감으로 부임하여 간교한 아전들을 엄히 다스려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습니다.

 

36세에는 이항복의 휘하에 들어가 부령부사를 제수받았는데요.

 

강직한 성품으로 부령부사 재직시절 적폐를 일소하고, 병장기 정비에 전념하였으며, 군량미도 비축하여 부령진이 6진 가운데서 가장 튼튼한 진에 되게 만들었습니다.

 

42세에 진주 목사가 된 남이흥 장군은 임진왜란때 파괴되고 피폐해진 진주성을 지금의 모습대로 다시 중건해내었습니다.

 

남이흥이 안주목사로 재직중일때  중국 사신이 안주에 들리게 되었는데요.

 

사신이 오자 남이흥은 이들을 정성스럽게 접대하였고 이에 감복한 사신은 그를 칭찬하며 표창까지 내렸습니다.

 

광해군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남이흥이 출세를 위해 중국 사신에게 잘 보인 것이라며 탄핵 상소가 광해군에게 올라옵니다.

 

하지만 남이흥을 아꼈던 광해군은 오히려 안주목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며 그를 두둔하고 품계를 자헌대부로 올려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남이흥 장군에게 시련이 찾아오니 그것은 바로 인조반정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왕에서 쫓겨나니 그의 처지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습니다.

 

인조반정 공신들의 미움을 받던 남이흥은 1624년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됩니다.

 

그리고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1624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도원수 장만을 도와 반란군을 진압하는 최고의 공을 세웁니다.

 

이에 인조는 남이흥을 연안부사에 임명하였고, 그는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의춘군에 봉해집니다.

 

광해군 대에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두 세력과 조선은 큰 충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고, 후금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후금에게 밀려내려와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무장 모문룡을 적극 지원합니다.

 

홍타이지

 

이에 1627 1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가 기병 3 6천 명을 동원하여 아민을 총대장으로 삼아 조선 정벌군을 편성하여 출전시키니 이 전쟁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이때 영변부사 남이흥은 후금군이 쳐들어 온다는 급보를 듣고 지체없이 안주로 달려가 군비를 정돈하고, 고을 사람들을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합니다.

 

임진왜란때 무너진 성곽과 방어시설을 복구하였지만 그 준비기간이 너무나 짧았습니다.

 

 

후금의 주력 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도착합니다.

 

전투에 앞서 후금군은 남이흥의 투항할것을 권합니다.

 

이에 남이흥 장군은

 

“내가 나라의 명을 받고 변경을 지키는 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오랑캐를 무찌르게 하려 함이요, 오직 장군의 영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영위만을 가진 것으로 그친다면 그 어찌 나라의 뜻을 받드는 올바른 신하라 할 수 있겠느냐? 나에게는 다만 너희들의 오랑캐를 섬멸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요, 그것만이 영광되고 흔쾌한 일이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싸움에서 죽는다면 그 또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영광된 죽음이 아니겠는가?”

 

라 일갈하고 거절합니다.

 

 

곧이어 시작된 안주성 전투.

 

 

후금군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성을 포위하며 파죽지세로 공격을 하였고, 남이흥 장군은 부하들과 성 위에 올라 분전하였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패색이 짙어지자 남이흥 장군은 후금군에 화약고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화약고에 불을 질러 분사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52세였습니다.

 

남이흥 장군의 사후 그의 충절을 기린 사당 충민사가 안주에 세워졌습니다.

 

남이흥 장군은 강직한 성품으로 기존의 적폐를 청상해 백성들을 평안케 했으며,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나라를 생각한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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