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절세 미인이었던 화협옹주
정실 왕비가 낳은 임금의 딸을 공주라 하며,임금의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 합니다.
조선시대 옹주 중 절세미인이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선의 제21대 임금 영조의 일곱째 딸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입니다.
그녀는 화평옹주의 친여동생이자 사도세자의 친누나입니다.
화평옹주는 전해지기로 품성이 어질고 미모가 절세가인이었다고 합니다.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잃고 후계자가 될 아들이 태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빈 이씨가 옹주만 연이어 4명을 낳아 이번에는 아들이겠지 기대했을 영조.
그러나 1733년 3월 7일 또 딸인 화협옹주가 태어나자 영조는 후사를 근심했다고 합니다.
1739년 그녀는 화협옹주로 봉해집니다.
1743년 화협옹주가 11살 되던 해에 영의정을 지낸 신만의 아들인 영성위 신광수와 혼인합니다.
옹주가 혼례를 올린 시기에는 마침 가뭄이 닥쳤기 때문에 영조는 혼례를 미루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간언으로 검소하게 치렀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줄곧 딸만 태어났던 탓에 영조가 화협옹주를 미워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영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 귀를 씻고 양치질을 했으며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렸다. 동병상련 처지였던 세자와 화협은 서로를 동정하며 각별한 남매 사이를 유지했고, "우리 남매는 귀 씻을 준비물이로다"라고 한탄하며 서로 웃기도 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영조실록 등을 보면 한중록의 기록과는 다른 부분이 발견됩니다.
영조는 화협옹주의 사저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으며, 화협옹주방에서 진 외상 빚을 모두 갚아주기도 했습니다.
화협옹주의 궁방은 다른 옹주들과 비교해서 그 규모가 결코 적지도 않았는데요.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화평옹주나 화완옹주에 비해 덜 사랑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미워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더해 화협옹주가 그녀의 어머니 영빈 이씨를 매우 닮았다는 말도 있으니 영조가 평생동안 가장 사랑했던 후궁 영빈 이씨를 닮은 딸을 미워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화협옹주의 남편인 신광수는 재물을 탐하고, 사람 됨됨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1761년 관아에서 일하는 서리를 폭행하여 영조가 파직을 명한 적도 있을 만큼 영조의 미움을 샀습니다.
화협옹주는 20세 젊은 나이에 홍역을 앓고 요절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영조는 옹주의 집으로 행차하려 했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영조의 건강이 나쁨을 이유로 만류합니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아픈 건 당파싸움 때문이지 딸이 죽어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다." 라 소리쳤다고 합니다.
최근 화협옹주의 무덤이 발견이 되었는데 무덤에서는 영조가 젊은 나이에 죽은 딸에 대한 슬픔을 적은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비록 궐내가 평탄치 못한 때에 처하였지만,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담박하고도 고요하며 조금도 간여하는 바가 없었으니 마치 듣지 못한 듯이, 보지 못한 듯한 것이 곧 화협의 성품이었다.
(중략)
한 줄 기록하는데 눈물 열 줄기가 흘러내린다. 아 슬프구나, 아, 슬프구나!
-《어제화협옹주묘지》, 영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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