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고려 거란 전쟁의 분수령 안융진 전투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었다는 것은 국사시간을 통해 많이들 배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서희가 무턱대고 거란의 소손녕과 외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특히나 거란군이 유리한 상황이었다면 외교가 아닌 무력으로 고려를 계속 공격했을 겁니다.
거란이 고려와 외교 담판을 벌일 수 있도록 만든 전투가 안융진 전투였습니다.
안융진은 현재의 평안남도 안주시 입석면 내동리 일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보통 진 이라는 것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설치되는데 안융진은 청천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어, 남방 혹은 북방 지역을 빠르게 넘나들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고려 4대왕 광종 때 이 지역에 성곽을 쌓았고 993년(성종 12) 거란 장수 소손녕이 이끈 대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안융진 공방전에서 고려군이 승리함으로써 거란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 강화회담이 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916년에 건국한 거란은 926년 발해, 986년 정안국(발해의 후신)을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를 석권한 후 중국 대륙의 주인 송나라와 전쟁을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후방을 방비해둘 필요가 있어 송과의 정벌 전쟁 전 단계로 고려를 공격했습니다.
993년 10월 거란의 동경 유수 소손녕이 자칭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이는 허장성세로 실제는 10만 정도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거란군과 청천강 이북의 봉산군에서 첫 전투를 벌인 고려군.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고 선봉장 윤서안이 포로로 잡히기까지 합니다.
거란군의 위세에 놀란 고려 성종은 안주에서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물러났으며, 첫 전투에서 대패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고려는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 안주성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안주성을 점령하면 서경에 닿을 수 있고, 서경마저 점령하면 수도 개성까지는 무인지경으로 내달릴 수 있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주성에 고려의 주력군을 배치하고 거란의 침공을 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려의 계획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거란은 고려군의 허를 찔렀습니다.
실제로는 안주성을 공격할 것 처럼 허장성세를 부리고, 별동대를 구성해 청천강 하류에 위치한 작은 토성인 안융진을 공격하게 합니다.
안주성과 안융진의 거리는 70리. 안주성에 총사령부를 두어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고려군으로서는 거란군에게 기습을 당한 것입니다.
거란이 안융진을 점령하면 청천강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 있고, 이후 서경을 거쳐 개경까지 공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란의 별동대에게 기습당한 안융진의 수비를 맡고 있던 책임자는 중랑장 대도수 였습니다.
대도수는 발해의 왕족으로 발해의 마지막 태자였던 대광현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고 대광현의 동생 대복모의 아들이라 기록도 있습니다.
대도수는 발해 유민 후손들의 지도자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고려군의 계급은 상장군(정3품), 대장군(종3품) 장군, 중랑장, 낭장 순이었으며, 중랑장은 장군 밑의 계급으로 지금 군대의 편제로 보자면 연대장 정도 되는 영관급 지휘관이었습니다.
대도수와 함께 안융진을 방어했던 또 한 명의 인물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고려의 무쌍 유금필 장군의 손자 낭장 유방이었습니다.
👉👉한국사 최강의 괴수, 단점이 없는 완벽한 무장 - 유금필 장군.
대도수와 유방은 거란군의 기습에 1000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거란의 별동대 숫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1만명 정도의 정예병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전력상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은 거란군에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으며 결국 별동대를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안융진 전투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던 전투였지만 1차 여요 전쟁의 양상을 뒤바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안융진에서 패배한 거란군의 사기는 꺾였으며,고려에 항복만 요구하며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고 청천강 이북에 자리 잡고 눌러앉았습니다.
봉산 전투에서 대패했던 고려는 거란에 항복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었는데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무되어 항복이 아닌 항전과 강화전략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나선이가 서희였고, 외교 담판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서희의 외교력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도수와 유방이 안융진에서 거란군을 격파했기에 가능한 부분이었습니다.
'역사적 호기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 할복까지 생각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생긴 트라우마 (0) | 2022.10.28 |
---|---|
임진왜란 사명대사가 말한 조선의 보배는 무엇일까? - 가토 기요마사와 사명대사 (0) | 2022.10.12 |
사명대사의 스승. 임진왜란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승군을 이끌고 왜군과 싸운 서산대사 (0) | 2022.10.11 |
선조에게 도끼 상소를 올리고 행동하는 선비였던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 그리고 칠백의총 (0) | 2022.10.08 |
태백산 호랑이 평민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 그의 활약과 허망한 최후 (0) | 2022.10.07 |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