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하면 생각나는 장군은 이순신 장군, 김시민 장군, 권율 장군 같은 분들이 대표적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정기룡 장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임진왜란 때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 정기룡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이 바다에서 23전 23승 연전 연승을 거두실 때 정기룡 장군은 육지에서 60전 60승 무패 신화를 만들었는데요.
조선왕조 실록에 80 여군데나 기록되어 있고 임란 당시 왜구들의 기록에 보면, 왜적이 보는 앞에서 왜적의 배를 갈라 생간을 씹어먹으며 그대로 돌격해 7일 동안개 왜군부대 9천에 가까운 군사를 고작 7백으로 휩쓸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주성 탈환은 물론이고 거창, 금산, 고령, 성주, 합천, 의령, 경주 등 일대에서 그의 활약이 빠진 곳이 없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정기룡 장군에 대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본명은 정무수였으며, 본관은 진주로 후에 곤양 정 씨의 시조가 되는 인물입니다. 경남 하동의 어느 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정무수.
1586년 무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선조가 자다가 꿈에서 종각에서 자는 용을 보았고, 다음날 종각에 가서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기룡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무과에 급제하자 선조가 친히 정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하는데요.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가고 다음 해 훈련원 봉사가 되었습니다.
정기룡 장군이 31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이때 정기룡은 승진하여 별장 관직에 있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 개전 첫 해 조선 땅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습니다. ‘귀신같은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10만이 넘는 왜군 앞에 조선군은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수많은 백성들이 뿌린 피로 산하는 처절하게 물들었습니다.
부산 앞바다로부터 왜군의 침탈을 받은 지 고작 두 달여 동안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파천했다가 또다시 의주까지 피신했습니다.
1592년 5월 정기룡 장군은 상관인 경상우 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하였는데요. 이때 조경은 정기룡의 기개를 보고 돌격장으로 삼았습니다.
4월 23일 무렵 조경은 거창에서 왜장 구로다의 좌군과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부장이었던 정기룡이 기병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선두에 서서 맹공을 가해 구로다의 좌군 선봉대500여 명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조경과 양사준이 경상우도 지역의 관군을 이끌고 금산에서 방어전을 펼치다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았고 경상 우병사 조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순간 정기룡이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며 적병들을 무수히 참살하고 적의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해냈습니다.
이 활약이 마치 삼국지에서 조운이 홀로 아두를 구한 것을 연상하게 하여서 임진왜란의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상관인 조경을 구출한 정기룡은 곧바로 군을 이끌고 퇴각했습니다. 비록 경상 우방어사 조경은 목숨을 건졌지만 치열한 전투로 인해 자신을 비롯해 많은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날의 전투로 정기룡의 이름은 조정에 알려졌으며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정기룡의 무용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기룡이 상관인 조경을 구출한 것은 『난중잡록』뿐만 아니라『선조실록』에서도 기록되어있고,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정기룡의 전공을 치하하는 대목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후에 조선에 파병된 명의 장수들 역시 대체로 정기룡을 용장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명의 제독 마귀는 이순신, 권율, 한명련과 더불어 정기룡을 조선의 4대 양장이라고 칭찬했는데요. 이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정기룡 장군이야 말로 가히 조선을 대표하는 용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후 곤양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아냈고, 유병별장을 거쳐 상주 판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국토 대부분이 왜군 수중에 떨어지다시피 한 1592년 11월의 칠흑 같은 어느 날 밤. 경상감영이 있는 상주성 외곽에 갑작스레 거센 횃불의 물결이 일렁였습니다. 상주판관 정기룡이 이끄는 수백여 명의 민ㆍ관군 합동부대가 상주성 탈환을 위한 기습 공격에 나선 것이 입니다.
정기룡 장군이 선택한 전술은 화공 전이었습니다.적들이 조총으로 조준 사격을 할 수 없는 야밤을 틈타 성 안의 왜군을 향해 불화살을 뿌려댔으며 난데없는 불길에 놀란 왜군은 허겁지겁 몸을 피해 횃불이 없는 동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기룡이 파놓은 함정이었는데요. 동문에 매복하고 있던 정기룡의 부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적군을 베어낸 뒤
마침내 상주성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기룡의 연전연승은 패망의 짙은 그늘에 휩싸여 있던 조선 조정과 백성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불씨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서 잇달아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며 해상권을 장악한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이순신과 함께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이 있다’는 말도 그때부터 나왔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1세였습니다.
이후 진주 목사 김시민을 도와 진주성 부근에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주둔하여 왜군을 견제함으로써 진주대첩에도 다소 기여했고 1593년 전공으로 회령 부사에 승진되었고, 그 해 왜적에게 왕자를 내준 반역자 김수량 등 16인을 효수했습니다.
1594년 당시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에게 “경상도 전체에 백성들의 인적이 드문데 정기룡이 버티고 있는 상주성에는 10만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며 그를 칭찬하자, 선조는 정 3품의 벼슬(상주목사)을 내렸다. 이후 통정대부에 올랐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 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8월 7일 고령읍 내곡리에서 벌어졌던 둔적 교전에서 왜장 다 히라가 이끄는 일본군1천여 명의 병력을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고, 16일 용담 천대첩에서는 현재의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용담 천변에서 대치하고 있던 왜군을 유인해서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때 용담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왜장 시마즈의 군사는2만 명에 이르렀지만 고작4천여 명뿐인 조선 관군에게 참패를 당해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5백여 명에 볼과했다고 합니다.
정기룡 장군이 이룩한 고령 지역에서의 두 차례 승전은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왜장 가또 오가 이끄는 부대는 월 20일 함창, 상주에서 남하하여 10월 3일 울산으로 철수했고 모리와 구로다가 이끄는 일본군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598년에는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 용양위부호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다시 경상 우병사가 되었습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 방어사로 나가 다시 침입해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처했고, 다음 해 김해부사·밀양부사·중도 방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그 뒤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도총부 총관, 겸 울산부사를 지냈습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보국숭록대부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죽었습니다.
상주의 충렬사에 제향 되고 시호는 충의, 묘는 상주군에 있습니다.
전후 6년 뒤인 1605년에등 공신에 올라서 일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과 비교를 하지만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이고, 정기룡은 "선무 원종공신"등인 것입니다.
선무공신 1등은 이순신, 권율, 원균 3명이고, 선무 원종공신등에는 조헌, 고경명 부산포에서 전사한 정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등이 있으며 약 565명 정도가 선무 원종 1등 공신이라고 합니다.
선무공신은 1~3등까지 합해서 18명인데 비해 선무 원종공신은 총 9060명에 달해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정기룡 장군의 공이 모자라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나이에 화려한 전적을 가진 정기룡 장군을 정치적으로 견제했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그의 업적은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가 순국한 지 151년이 흐른 1773년엔 영조가 ‘충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정기룡 장군은 13세 어린 시절에 시묘살이(부모님이 돌아가 시 면 3년간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며 공양을 드리는 일)를 할 정도로 효심도 지극한 사람이었는데요.
해유 충무 육유충의(海有忠武 陸有忠毅)’, 즉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이 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육지에서 60전 60승이라는 전승 신화는 일찍이 세계 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업적입니다.
정기룡이 육전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는 단연 독보적이었습니다.
임란 초기 조총을 앞세운 적에게 모든 방어선이 힘없이 무너져 내린 바람에 조선 육군 장수들은 지축을 흔드는 왜군의 호각 소리만 들어도 꽁무니를 감추기에 급급했던 것에 비해 정기룡은 언제나 불퇴의 각오로 전장에 가장 먼저 달려 나갔습니다.
임란 내내 그가 치른 크고 작은 60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줍니다.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장수 중에 불패 신화를 쓴 장수는 이순신 장군과 정기룡 장군뿐이며,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을 지휘한 유일한 조선 장군이 정기룡 장군이었습니다.
정기룡 장군은 지덕을 겸비한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구국의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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