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의 충신이 된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 사야가 김충선

 

여러분들은 혹시 항왜라는 말을 들어본적 있으십니까? 항왜는 임진왜란때 항복한 왜군을 칭하는 말입니다. 보통 전황이 좋지 않을때 목숨을 부지하려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와는 달리 조선을 진심으로 동경해 투항을 결심한 항왜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야가 김충선 입니다.

 

일본 선봉장에서 조선의 장수가 되어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누구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사랑하였으며, 충성을 다한 사야가 김충선에 대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사야가는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군사 3000을 이끌고 조선을 처들어 왔는데,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습니다. 사야가는 일본 최강 철포부대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병전 조선을 동경하여 이미 투항을 결심했다 합니다.

 

사야가가 남긴 <모하당술회가>에 보면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 오랑캐 문화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에 대해 탄식했으며, 아름다운 문물을 보고싶어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사야가

 

그는 송상헌이 지키던 동래성으로 상륙후 7일 만에 경상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했습니다. 그가 항복한 시기는 임진왜란 초기로 왜군이 연전연승을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야가가 항복 한다 했을때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야가가 바닥에 무기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박진은 그가 진심으로 항복 하러 온것이라 믿게 됩니다.

 

사야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를 전달하고 투항합니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사야가는 자신의 철포부대를 이끌고 귀화했고, 이후 조총 제작기술을 조선군에 전수하여 조총을 생산케 했으며, 조선군 조총대를 조직하는데 노력했습니다.

 

일본 선봉장이기도 했던 그는 누구보다 일본군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진법, 병참, 첩보, 전술 정보를 알려줘 조선군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야가의 노력 덕분에 조선은 1593년부터 일본군이 보유한 조총보다 화력이 더 좋은 조총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50년 뒤인 1650년대가 되어서 조선의 사격 기술이 동아시아 정상급으로 성장했는데, 이는 사야가의 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순후 그는 경상도 지역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였고, 홍의장군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했습니다. 울산 도산성 전투에서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휘하 장수로 자신이 직접 부대를 통솔해 대승을 거두었고, 왜군에게 함락된 경주,영천 등 18개 성을 되찾았습니다.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만큼 누구보다 적을 잘 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에 조정은 사야가를 종2품 가선대부에 제수하였습니다.

 

이후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선조로부터 성명을 하사 받았으며,  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습니다.

 

선조

 

선조는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며 김해 김씨로 사성하였습니다.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충선(忠善)’으로 지어졌습니다.

 

사성 김해김씨(賜姓 金海金氏)의 시조가 김충선(金忠善) 입니다. 이 날이 사야가가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난 역사적그날 이었습니다.

 

김충선은 왕명으로 벼슬과 성명이 내려지게 되자 은혜를 갚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왜란이 끝나고 1600년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하여 51녀를 두었습니다. 김충선의 나라에 대한 충심을 자식들에게도 항상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영달을 탐하지 말고 효제ㆍ충신ㆍ예의ㆍ염치를 가풍으로 삼아 자자손손에게 계속 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왜란 이후에도 그는 조선에 충성을 다하였고, 조정에 변고가 생길때마다 자청해 전쟁터로 나가 싸웠습니다.

 

왜란 이후 여진족이 급격하게 성장해, 북방 변경이 위협받자, 그는 스스로 변경으로 갔으며, 10년 간 국경방위 임무에 진력했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사야가는 정2품 정헌대부가 되었습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이괄 군에 항왜들이 많이 가담했었습니다. 그 중 무예가 뛰어난 이괄의 부장 서아지 라는 항왜는 도저히 조선군이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54세의 김충선이 김해에서 서아지를 만나 꾸짖은 후 참수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공으로 땅을 하사받았으나 받지 않고 군대의 둔전으로 사용하라고 반납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도 그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628년(인조 6) 4월 23일(갑인) - 영장(領將)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용맹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매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 때에 도망친 항복해 온 왜인을 추포(追捕)하는 일을 그 당시 본도의 감사로 있던 자가 모두 이 사람에게 맡겨서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가상합니다.

 

이 부분을 봐도 그가 얼마나 조선을 사랑하고 충성을 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김충선은 토병 한응변 등과 함께 자원군으로 나와 전투에 임했고, 이로 인해 상당직에 제수되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갔고, 광주 쌍령전투에서 청나라 병사 500기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에 조선 조정이 항복을 하면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자 김충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22세에 조선에 귀화해 66세까지 전쟁터에서 조선을 위해 목숨걸고 싸웠고, 나라를 위해 대성통곡을 한 김충선은 조선의 충신중에 충신이었다. 이후 1643년 국경 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의 간섭과 항의로 해직되어 고향인 대구로 돌아와 우록동에 은둔, 여생을 보냈습니다.

 

조선에 충성을 다했던 김충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남풍이 불어올 때면 뒷산에 올라가 고향인 일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지었다 합니다.

 

 

1642년 김충선은 72세의 나이로 경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마을에서 세상을 떠나 삼정산에 장사 지내졌습니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도 슬퍼했고 이웃에서도 마치 부모상을 당한듯 애통해 했다합니다.

 

 

우록마을 입구를 지나면 녹동서원이 있으며, 서원 뒤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녹동사가 있습니다.

 

 

임진왜란부터 공을 많이 세운 그는 조선에서는 영웅이지만자신의 고국인 일본에서는 배신자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시절동안  일본총독부에 의해 많은 비난과 질타를 받았었습니다. 우록동에 일본 경찰들이와서  매국노, 비국민의 후손이라며 매도했고, 김충선의 후손들을 귀찮게 한적이 많았다 합니다.

 

임진왜란 일본 선봉장으로 조선땅을 밟았던 사야가는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나 조선을 위해 한평생을 받쳤습니다.

 

그는 조선을 흠모해 귀화 한것이지 비겁하게 귀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사람이었다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습니다. 김충선도 이때 자신의 모든것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그의 희생과 노력이 조선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 입니다.

 

사야가 김충선 관련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진왜란 조선의 바다를 지킨 두명의 이순신 - 지금도 두 이순신 장군은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

임진왜란 두명의 이순신 장군 여러분들은 임진왜란 하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르나요? 아마 대부분 이순신 장군님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23전23승 불패 신화의 명장, 해전의 신 이순신 장

blogdaitso.com

 

한국사 가장 치욕스러운 패전 임진왜란 용인전투 - 1600의 왜군에 5만의 조선군이 참패하다

한국사 가장 치욕스러운 패전 용인전투 칠천량 해전과 더불어 임진왜란 최대의 굴욕적인 패전이 용인 전투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치욕의 패전이 용인 전투라 개인적

blogdaitso.com

 

반응형
교차형 무한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