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MBC 드라마 기황후를 통해 처음 알게된 고려 출신 원나라 황후였던 기황후. 원나라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고려 여인의 사랑과 투쟁을 다루었던 드라마속 기황후는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고 고려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왜곡입니다.
실제 기황후는 친원파였으며, 고려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자신이 움직이기 쉬운 왕을 세우는 등 고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일들을 자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드라마에 나왔던 기황후가 아닌 실제 기황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원 간섭기 고려는 수많은 처녀들을 원에 공녀로 보내야 했습니다.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처녀들을 바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나이 딸을 가진 집에서는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를 깎아 출가시키거나 어린 나이에 혼인시키기도 했습니다.
원 간섭기 80년동안 공식적인 공녀의 숫자는 180명 정도라 합니다.
원에 끌려간 공녀들은 대부분 황제,황부,황족들의 시녀로 들어가 힘겨운 생활을 했고, 일부는 지배층의 눈에 띄어 아내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황후 역시 고려에서 원에 공녀로 보내진 여인으로,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 시호는 보현숙성황후 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기자오 이며, 기식, 기철 등의 남자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기황후는 공녀로 발탁되어 원 수도인 대도로 끌려갔습니다.
1333년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추천으로 궁녀가 된 기황후. 그녀의 외모는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특출난 외모로 인해 원 황제 혜종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았고,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라 를 출산합니다.
이 당시 원 혜종의 정실 황후는 다나슈리 였고, 혜종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역할을 한 엘 테무르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힘을 등에 업은 다나슈리 황후는 오만방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황제와의 사이 또한 원만하질 못했습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기씨가 못마땅했던 황후는 매질에 인두질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13~15세 정도였다하니,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기씨는 또 다른 세력인 메르키트 바얀을 이용하여 엘 테무르의 집안을 무너뜨리려했고, 황제에게 바얀을 중용하도록 말하였습니다. 엘 테무르 사망 후 그의 아들 텡기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승상 바얀이 진압했습니다. 그리하여 텡기스의 여동생인 다나슈리는 역모 죄로 폐위되어 궐 밖으로 쫓겨납니다.
텡기스는 처형당했고, 쫓겨났던 다나슈리도 바얀이 보낸 독주를 먹고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혜종은 자신이 총애하는 기씨를 황후로 삼으려 했지만, 승상 바얀의 반대로 옹기라트 부족 출신 바얀 후투그를 황후로 삼았습니다.
황후가 되지 못한 기씨는 1338년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라를 낳았고, 몇 차례 반대가 있었지만 혜종은 그녀를 제2황후로 책봉. 이때부터 그녀는 기황후로 불리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드라마속 바얀 후투그는 투기가 심하고 기황후를 모략하다 사약을 마시고 죽는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바얀 후투그는 조용한 성격에, 본분에 맞게 행동하는 황후상의 여인이었으며, 혜종 역시 그녀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드라마와는 달리 바얀 후투그는 기황후에 밀려 있었지만, 황후 자리를 지키다 병으로 사망하였고, 그녀가 죽고나서야 기황후는 제 1황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기황후는 혜종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자신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메르키트 바얀도 탄핵하여 축출했습니다. 그녀는 황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로 삼았습니다.
1353년 자신의 아들인 아유르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고려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책임자로 삼아 군권도 장악했습니다.
이렇게 기황후가 원의 황후가 되어 지위가 높아지니 고려에서는 스스로 딸을 원으로 보내고 출세를 해 보려는 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기황후처럼 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어려운 일을 기황후는 해내고 만것입니다. 기황후의 소식은 고국인 고려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에 살고 있던 그녀의 가족들이 기황후를 믿고 나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둘째 오빠 기철이라는 인물로, 그는 동생만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고려 조정의 요직에 친인척을 중용하게 하며, 동생만 믿고 횡포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1356년 공민왕은 반원 개혁정책으로 기철 일가를 숙청해버리고, 이에 분노한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삼기 위해 일을 꾸밉니다.
1364년 고려 출신 최유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려를 공격케 하였지만, 고려의 명장인 최영장군에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원나라 조정에서는 황태자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정쟁이 격화되었고, 반황태자파 볼라드 테무르가 황태자 지지파 코케 테무르에게 패해 죽었습니다. 황위 계승을 둘러싼 이 정쟁으로 원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각지의 반란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1365년 바얀 후투그가 죽고 자신의 권력을 총동원하여, 기황후는 드디어 원나라 제 1황후가 됩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3년 뒤 주원장과 명나라 군대가 대도로 침략해와 혜종과 황태자는 대도를 버리고 옛 몽골 땅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로써 세계 대제국 원나라는 멸망을 하게 되고, 북원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됩니다.
1370년 혜종이 죽자 아유르시리다라는 북원의 소종으로 즉위를 하였습니다.
몽골지역으로 패퇴한 이후의 기록에는 기황후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황태후가 되어 살다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나라 제1황후이자 칸의 어머니인 그녀의 최후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대비해 조용한것 같습니다.
드라마속의 기황후는 역사왜곡이 많이 된 인물입니다. 공녀에서 출발해 제1 황후가 되었고, 아들을 칸으로 만든 입지전적 인물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공녀로 고생을 해놓고, 앞장서서 고려에서 공녀를 차출해 원나라 고관들에게 뇌물로 주기까지했다고 합니다. 또한 고려에 군대를 보내는 등 고려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그녀가 일으킨 악영향도 많아 후대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나라가 힘이 없어 어린 나이에 공녀로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다보니 고려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을 수 있었을겁니다.
만약 그녀가 원나라의 제 1황후가 된 역사적인 그날 이후 고려를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했더라면 후대의 평가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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