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고속 승진 & 무쌍 신화 황진 장군
임진왜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을 많이들 생각하실텐데요. 그리고 더 꼽아본다면 권율장군, 김시민장군 같은 분들이 생각날 겁니다.
오늘은 이분들 말고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년도 되기전 종6품 현감에서 종2품 충청병마절도사가 된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날 계급으로는 중위에서 중장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요.
개인의 무쌍을 바탕으로 이러한 초고속 승진을 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다름아닌 황진 장군입니다.
그가 쌓은 무용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인지도는 낮지만 결코 그 공은 낮지 않았던 황진장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황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명보, 호 아술당, 시호는 무민입니다. 1550년(명종 5) 전라도 남원 아버지 황윤공과 어머니 남원 방씨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5대조는 조선 세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은 황희 입니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거쳐 1577년 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1583년 여진족이 쳐들어와 일으킨 니탕개란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1591년 다시 선전관이 되어 조선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이때 그도 조만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한양을 점령하자 그 당시 동복 현감으로 있던 황진은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3도 근왕병에 참가합니다. 용인에서 왜구와 맞붙은 3도 근왕병은 불과 수천의 왜군에게 대패를 하고 맙니다.
이때 황진은 전술에 영향을 미칠 만큼 높은 직책이 아니라 활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와해된 삼도 근왕군의 다른 병력과는 달리 휘하 병력을 온전히 전력 보존해 돌아왔습니다.
왜군 제6진의 주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라도로 진출하려 했습니다. 왜군은 웅치와 이치쪽을 통해 전주로 나아가려했습니다. 고바야카와의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가 1만 군사를 이끌고 웅치로 진격합니다.
이때 웅치고개는 조선 관군과 의병 1000명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웅치전투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죽을때까지 싸우며 분전하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이복남이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때 황진의 군사가 도착해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해 승리합니다. 패배한 일본군은 도주하였는데 황진은 이를 추격하여 대파합니다.
이 전투의 공로로 황진은 종5품인 훈련원 판관으로 승진합니다.
왜군은 웅치까지는 돌파했으나 결국 안덕원을 돌파하지 못하게됩니다.
이제 황진은 병사들을 이끌고 이치고개로 향합니다. 거기에서 전라도도절제사 권율 장군과 이치전투를 준비합니다.
1592년 7월10일 권율과 황진이 지키고 있는 이치고개로 왜군이 몰려듭니다.
왜군이 총을 쏘며 달려들자, 황진은 부하 장수인 공시억 등과 함게 고지에서 맞서 싸웠습니다. 그의 다른 부하 장수인 위대기는 복병으로 일본군을 급습했습니다. 피비린내나는 혈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온 종일의 전투 중에 황진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한때 사기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왜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라도가 보존되어 후방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왜군이 이치 전투를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았을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실록에서도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황진의 공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선조 수정실록에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연려실기술에는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하므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치전투에서 황진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공으로 인해 훈련 부정으로 승진했다가 다시 익산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에 오르고, 종3품 통정대부로 승진합니다.
이치전투 이후 절도사 선거이를 따라 수원에서 싸웠습니다. 이때 정탐을 나갔다가 왜군에 포위되었지만 그의 무쌍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듬해 1593년 봄에 황진 장군은 종2품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합니다. 현감에서 충청 병마절도사까지 1년여 동안 초고속 승진을 한 그였습니다.
이후 경기 죽산에서 왜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벌였습니다.
죽산은 삼남 지방과 한양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지세가 험난해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습니다. 죽주 산성에 칠본창으로 유명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군 40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황진은 이끌고 온 병력 천여명으로 후쿠시마 군에 대해 여러 차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승리했습니다. 이에 후쿠시마는 황진이 주둔하고 있던 안성을 공격하려고 죽산성을 나왔지만 오히려 매복에 걸려 패배하고 황진 에게 죽산성을 빼앗기고맙니다. 이에 후쿠시마는 경상도 방면으로 퇴각하였지만 황진은 경상도 상주까지 추격해 대파하였습니다.
교통의 요지이자 방어하기 좋았던 죽산을 황진은 적의 1/4에 불과한 군대로 틸환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웁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충청 부근을 지키던 일본군 활동이 봉쇄되어 군량 부족으로 결국 4월에 한양에서 일본군이 퇴각하고 맙니다.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히 명령을 내립니다.
왜군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황진 장군은 왜군과 싸우기 위해 휘하 병력 700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갑니다.
왜군의 병력은 거의 10만에 달했기에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다른 장수들과 명나라 군대조차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물러나고 맙니다.
하지만 황진장군은 끝까지 진주성에서 끝까지 남아 왜군과 싸울것을 결심합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전력을 살펴보면 왜군은 10만 정예병이었으며 조선은 관군과 의병 및 민병을 합쳐 6천여명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약 6만여명의 진주 백성이 있었습니다.
진주성 전투가 시작이 되고 황진은 21부터 28일까지 진주성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6월 28일에는 적이 공격해오자 직접 지휘해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황진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군 병사가 쏜 총에 왼쪽 이마를 관통당해 즉사하고 맙니다.
거기다 진주성은 이날 내린 큰 비로인해 성벽이 무너져내렸습니다.
황진을 잃은 성안의 관군민들은 성을 지키기위해 끝까지 버텼지만 이튿날 결국 함락이 되고맙니다.
성이 함락되자 복수에 미쳐있던 왜군은 성안에 남아있던 백성과 가축을 포함해 생명체는 모두 학살합니다. 영웅의 죽음과 함께 진주성도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것 입니다.
황진은 사후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었습니다.
황진은 군사 지휘관으로서도 출중한 인물이었으며 일신상의 무력도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죽을것을 알고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운 의로운 장수였습니다.
이런 황진장군이 활약상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너무 일찍 사망한것도 그러한 이유중 하나일 것 입니다.
황진 장군이 사망하자 그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말했다 합니다.
임진왜란 초기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황진 장군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있어 전라도가 보전이 될 수 있었고, 병참기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전라도가 뚫리지 않아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도 무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황진 장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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