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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5대 집권자이자 세습 정권을 만든 최충헌

 

무신정권 4대 집권자였던 이의민을 숙청하고 5대 집권자에 최충헌. 그는 이후 정권을 세습화 하는데 성공하여 4 60년간 최씨 무신정권을 연 인물입니다.

 

무인시대 최충헌

 

60년 최씨 정권의 기틀을 세운 최충헌은 문신적 자질을 갖춘 무인으로 독재자로서의 기본 요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174년인 명종 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별장직에 오르면서 출세를 보장받는 듯했으나, 이의민이 집권하자 출세에 제약을 받게됩니다. 이후 20년 동안 승진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요.

 

 

이의민을 몰아내는 정변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가 머물렀던 지위는 섭장군이라는 하급 지위였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상급자가 나타날때마다 상당한 갈등을 빚었으며 그러다 결국 진주 안찰사직에서 파면되는 불운도 겪는데요.

 

그의 나이 50을 바라보던 시점인 1196년 이의민에 의해 배척받던 세력을 규합하여 정변을 일으킵니다.

 

이의민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자신의 아우 최충수의 비둘기를 강탈한 것을 구실 삼아 이의민과 그의 추종 세력을 제거하고 쿠데타에 성공하며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최충헌으로 인해 13년간 지속된 이의민 정권은 하루 아침에 몰락합니다.

 

그는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하기로 유명했는데요.

 

자신의 거사를 도왔건 이경유와 최문청까지도 숙청하며 자신의 기반을 닦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올리려는동생 최충수와도 마찰이 생기자 결국 동생까지 제거하였고, 조카인 박진재, 무신들에게 존경을 받던 두경승까지 죽임으로써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또한 명종, 신종, 희종 3명의 왕을 자신의 손으로 갈아치우며 본인의 정권을 공고히 하고, 세습화하게 됩니다.

 

 

왕 못지않은 권력과 사치를 누렸지만, 왕이 되려는 꿈은 꾸지 않았던 영악한 독재자. 누구보다 권력을 탐하였지만 권력의 마지막 절제도 알았던 인물이 최충헌이었습니다.

 

 

이런 최충헌을 죽이기 위해 여러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희종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갔던 경우도 있었는데요.

 

 

최충헌의 무단통치를 7년간이나 묵묵히 지켜보던 희종이 자신의 측근 내시들과 함께 최총헌을 제거하려 한 것입니다. 무방비 상태로 희종을 뵈러 수창궁으로 들어온 최충헌에게 내시들이 공격을 가했고 이에 급하게 몸을 피해 최충헌은 희종에게 살려달라 애원합니다. 하지만 이를 외면하는 희종을 보며 최충헌은 희종의 속내를 알게 됩니다. 그는 궁중 출납창고 문틈에 몸을 숨겨 간신히 목숨을 보전했고 궁궐 밖에 있던 측근들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관련자들을 모두 처단하게됩니다.

 

분노한 최충헌으로 인해 희종은 폐위되어 쫓겨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최충헌은 자신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처단하였습니다.

 

 

최충헌은 1219년 천수를 다 누리고 71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최충헌의 장례식은 어느 제왕에 못지 않게 화려하고 컸다고 합니다.

 

최우

 

최충헌이 뒤를 이어 최씨 정권을 세습하게 되는 것은 그의 아들인 최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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