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치다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 수문제 양견은 589년 남조의 진을 멸하고 전국 통일을 달성합니다.
이후 수양제는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수나라 2대 황제가 됩니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이런 수나라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607년 수양제가 돌궐 추장 처소에 갔다가 고구려 사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수 양제는 힘들게 굴복시킨 돌궐과 고구려가 손을 잡고 수나라를 공격할까 봐 많이 놀랐습니다.
수양제는 그 자리에서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 왕이 입조하고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라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26대 왕 영양왕은 수나라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전쟁을 선택했습니다.
수양제는 만주의 고구려를 방치했다가 결국 자신의 나라가 침공당할 것을 염려해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결사적인 각오를 합니다. 그래서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5년간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함선 300척도 추가로 건조하였습니다.
612년 정월 중국 탁군에서 수양제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수나라 군사는 113만 3800명이 출진하였고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300만의 대군이었습니다. 이 군사는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 최대의 규모였습니다.
수나라 대군은 출병에만 40일이 걸렸고 그 길이가 960리 약 377km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서울에서 대마도까지의 거리에 해당할 만큼의 길이로 어마어마한 대군이 고구려 침공을 위해 출전한 것입니다.
7세기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바꿀 대전쟁의 서막이 오릅니다.
탁군을 출발한 군사들은 요동성으로 향했고 내호아의 수군은 보급품을 싣고 평양성으로 향했습니다.
이에 맞서는 고구려의 병력은 34만 5천 명 정도로 수나라 군의 4분의 1 수준이지만 수비하는 입장이라 병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전투에 따라 10배 이상의 차이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612년 2월 고구려 1차 방어선인 요하에서 고구려군과 수나라 군대는 처음으로 전투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부교를 이용한 수나라의 공격으로 인해 고구려군 1만 명이 사망을 합니다.
고구려군은 요동 최대 거점인 요동성으로 퇴각을 하고 수성전에 들어갑니다. 이 성은 수십만 섬의 군량까지 준비한 고구려의 철옹성이었습니다.
수나라의 100만 대군은 요동성 공격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공성 무기까지 동원한 공격에도 요동성은 3개월을 버텼습니다. 전쟁 중 수양제는 친정을 하며 모든 결정 사안을 자신이 직접 보고받고 지시를 했습니다. 한시가 급한 전쟁 상황 중에 이러한 지휘체계는 수나라 군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요동성 성주는 항복작전을 통한 기만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거짓 항복 후 수양제의 지시가 내려오는 동안 전력을 회복하고 다시 반격했습니다. 이를 통해 시간을 벌면서 수 대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역사가 스포일러로 결국 수나라군은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100만의 어마어마한 대군 수나라가 왜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수나라가 고구려에 이기지 못한 이유
1. 고지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산성
고구려의 산성이 있는 위치가 높고 험준했습니다. 산성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수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 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방어에 최적화된 고구려 성 고구려의 성은 치, 어긋문 옹성 등의 방어 구조물이 있어서 적의 집중 공격을 막고 측면 공격도 가능한 방어에 적합한 구조였습니다.
2. 뛰어난 축성술
고구려는 성을 쌓는 축성술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석축 및 성벽을 쌓을 때 외벽이 무너져도 안쪽의 성벽은 그 형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나라 대군의 공성 병기 공격에도 성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3. 수나라 수군의 패배
수나라 해군을 이끈 내호아의 자만으로 수 해군이 패배를 했습니다. 내호아는 요동에 발이 묶인 육군이 오지 않자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 대패합니다. 그로 인해 수나라군의 보급에 큰 차질이 생깁니다.
고구려의 고건문은 수 해군을 평양성 깊숙이 유인하여 격퇴하였습니다 고구려군을 승리로 이끈 고건문은 후에 27대 왕 영류왕이 되는 인물입니다. 전투에서 배고픈 부대만큼 오합지졸인 부대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여파는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수나라 대군은 고구려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고구려는 4차 방어선까지 구축해 두고 있어서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여러 성들을 함락하며 진격해야 했고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수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의 여러 성들을 공격했지만 단 하나의 고구려 성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에 수양제는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리수를 둡니다. 바로 고구려군의 방어성과 산성을 무시하고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현대전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전격전과 유사하다 할 수 있지만 전격전에서 필수 요소인 빠른 속도와 기동성이 무시된 보병으로 이 작전을 진행한 것입니다.
별동대는 별도의 보급 부대가 없어서 병사들에게 100일치 식량 세 섬과 자신이 타는 말먹이까지 들고 가게 합니다. 거기에 병사가 입고 있는 갑옷과 무기까지 들고 평양성까지 행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속도와 기동력은 무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나라 우중문은 30만 5천의 이런 별동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합니다.
군대에서 훈련할 때 군장과 총만 들고 행군을 해도 힘이 드는대 낯선 지형에서 무기와 보급품까지 들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식량을 몰래 땅속에 파묻어 버리는 병사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들은 평양성까지만 가면 수나라 수군의 보급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내호아의 수군이 대패한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런 수나라 별동대 내부 사정을 알 리 없는 고구려에서는 수나라 군의 정보를 알아내려 합니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은 거짓 항복을 하여 수 별동대를 정탐한 후 내부 사정을 확인하고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일곱 번이나 거짓으로 패배하며 수 별동대를 지치게 합니다.
배가 고픈 수나라 별동대는 현지에서 약탈을 통해 식량을 수급하려 했지만 고구려의 청야전술(적이 이용할 수 있는 보급품을 없애는 전술)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수군의 패배를 확인하고 보급을 받지 못한 수나라 별동대는 공격도 철수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평양성 인근까지 온 수 우중문에게 을지문덕 장군은 시를 보냅니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시를 보면 '전쟁에서 공도 쌓았고 고구려도 그만 싸울 것이니 이쯤에서 돌아가세요' 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수 별동대를 방심한 상태로 철군하게 하려는 을지문덕 장군님의 계략이었습니다.
수 별동대로서는 공격이 어려운 평양성과 해군의 패배로 인한 보급에서의 차질, 을지문덕 장군의 항복 의사로 철군의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중문은 철군을 시작합니다.
612년 7월 살수에서 방심하고 철군을 하는 수 별동대를 고구려군이 추격하여 후미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대승을 거둡니다. 이 전투가 바로 살수대첩입니다. 살수대첩으로 인해 처음 별동대 30만 5천의 군사 중에서 살아 돌아간 병사는 2천7백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450리씩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수나라는 두 번이나 더 추가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를 거듭했고 대규모 토목 공사 및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618년 멸망하고 맙니다.
수양제의 무덤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요동에서 일을 벌이다 천하를 잃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함으로써 동북아 정세는 급변하게 됩니다. 바로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이연이 당나라를 세운 것 입니다. 하지만 고구려 또한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신라가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동북아의 맹주 고구려. 고구려의 승리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길이 빛날 업적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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